아파트 학동들의 훈장 선생님
등록 : 2000-08-30 00:00 수정 :
“●아이들이 한자를 완전히 익히지는 못하더라도 나이가 들어서도 이 촌로한테서 한자를 배운 사실만은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해질녘이면 어린이들의 천자문 외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아파트촌이 있다. 부산 해운대구 좌동 해운대 신시가지 벽산아파트단지. 이 아파트에 사는 윤경미씨의 집이 서당이다. 화요일과 수요일 오후면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이 윤씨의 집 방 안에 걸린 칠판 앞에 둘러앉아 한자를 배운다. 훈장 선생님은 윤씨의 아버지인 윤명달(70)씨.
평생을 공무원으로 지내고 퇴직한 윤씨가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3년 전부터다. 중풍으로 불편한 몸을 회복하기 위해 운동삼아 버스를 타고 이곳 딸 집에 드나들면서 외손자에게 한자를 가르친 것이 계기이다. 그런 것이 어느새 입소문을 타고 아파트촌에 알려져 이웃 아이들이 하나둘씩 한자를 배우러 찾아왔다. 지금은 유치원생 8명, 초등학생 20명 등 28명으로 학동이 늘었다.
“아이들을 저한테 보내는 이웃 사람들이 차비에 보태 쓰라면서 얼마씩 걷어 건네주기도 하죠. 하지만 수업료는 전혀 안 받습니다.”
지금은 코흘리개 유치원생들도 잘 따를 정도로 가르치는 솜씨가 늘었지만 초창기에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를 두고 궁리도 많이 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서점에서 한자책을 직접 사서 수업을 진행했다. 그러다 아이들에게 흥미를 북돋워주기 위해 칠판을 사서 방에 걸어두고 가르쳤다. 요즘에는 수업방식을 조금 바꿨다. 하루에 가르칠 한자 10여개를 날마다 자신이 직접 써온 뒤 이것을 딸 집에 들여놓은 복사기로 복사해 공책에 붙이도록 하고 있다. 칠판을 보고 그저 달달 외우던 것에서 이제는 아이들이 직접 써보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한자뿐만 아니라 예절도 가르치고 있지요. 그래선지 어린이들이 꽤 의젓해졌습니다.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 때문인지 제 건강도 많이 좋아졌지요.”
학동이 늘면서 혼자 가르치는 게 벅차기도 하지만 되돌려 보낼 수 없어서 지금은 4반으로 나눠 가르치고 있다. 올 초에는 외손자와 함께 3년 전부터 배우기 시작해 제법 한자를 익힌 어린이 8명을 제1회 졸업생으로 배출하기도 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