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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모스크바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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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1-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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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가을, 1년여 앞으로 다가온 9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절치부심하던 DJ는 모스크바로 떠났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야권의 김영삼, 김종필씨와 손잡고 3당 합당을 하는 바람에 여소야대의 리더에서 소수파로 몰린 처지였습니다.

일제하 좌파 독립운동가들이 “빛은 모스크바에서”라고 노래했듯이, 그는 개혁·개방이 한창이던 소련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뉴리더의 상징이었던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나 위상을 과시하고, 한반도 평화에 진전을 이루는 것으로 훈풍을 일으킬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공기는 차가웠습니다.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지척에 있는 대통령궁의 문은 하염없는 기다림에도 열리지 않고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거듭된 전갈로 끝났습니다. 붉은 광장으로 구경 겸 산책을 나갔다가도, 혹시 연락이 올지 몰라 서둘러 숙소로 향하곤 했습니다. 결국 고르바초프 면담은 포기하고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을 만나려 했으나 이마저도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야당 단독으로 일을 어설프게 추진해서인지, 정부가 면담을 가로막았는지, 아니면 소련 내부사정 때문인지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DJ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일각이 여삼추고 차라리 감금됐으면 하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골방에 틀어박히지 않고 얘기를 나누고 평정을 유지하는 것을 가까이서 보면서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고르바초프가 얼마 전 한국에 와서 푸대접을 받고 속이 많이 상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정부 초청이 아닌 비공식 방문이어서 10년 전의 일과는 무관하지만, 정·재계에서 가치를 평가절하해 면담 일정을 갑자기 취소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르바초프나 소련의 위상이 그 사이 엄청나게 변했다지만 권불십년, 권력무상을 실감케 합니다.


마침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러시아 방문길에 나섰습니다. 야당 총재 자격이지만 위상은 10년 전 DJ와는 크게 다릅니다. 권력을 나눠가진 거대야당의 대선주자이고, 정부도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거 DJ의 모스크바행과 관련없고 비교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이뤄진 이 총재의 모스크바행은 10년 전의 궤적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변 강국의 지도자들과 안면을 트고, 그가 ‘감사 감사’를 연발한 출입기자들과 팀워크를 다지면서 워밍업을 하고, 귀국해서는 대선 레이스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서….

모스크바에서 그는 상생의 정치를 말했지만 수적 우위를 점한 한나라당은 밀어붙이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부질없는 의문을 가져봅니다. DJ나 고르바초프와 달리 오르막에 서 있는 그의 권력은 1년 뒤, 몇년 뒤 어떤 크기일까? 지금과 비교해서. 혹시 그는 지금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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