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음모
등록 : 2001-11-13 00:00 수정 :
사람이란 나이를 먹어가면서 편견과 아집이 드세지는 법이다. 거기에 남을 의심하는 버릇까지 더하고 보면 영락없이 오래된 인간임이 틀림없다. 아직 그럴 나이도 아닌데 세상의 말들에 대해 하나둘 의심하고 회의하는 버릇이 부쩍 늘어가는 까닭을 알 수 없다. 이럴 때를 병이라고 하는가보다. 남들이 다 그렇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말들까지 도무지 그 뒤가 의심스러워지는 게 한정이 없다. 그 목록을 만들어 죽 올려놔 보면 아마 세상의 모든 말들이 거짓과 음모투성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회의하고 의심하여 점점 아집과 독선만이 늘어가는 걸 피할 수 없다는 것도 모르는 바는 아닐 터인데, 아무래도 무슨 음모론에 휘말린 것이 아닌지 누가 좀 말려주어야 할 것 같다.
‘순박한 농촌’과 도시인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늘 들어오고 아무 거리낌없이 쓰는 말들 속에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폭로하려고 한다. 우선 시골에 관한 이야기다. 자연과 전원이 어우러진 농촌의 풍경이 아무래도 그럴듯해 보이는지 시골에 대한 동경이 꽤 깊은 듯싶은데, 말끝마다 붙어오는 ‘순박한 농촌’과 ‘풋풋한 인정이 숨쉬는 고향’이란 수식어가 의심스럽다. 거기에는 극악스럽게 살다가 가끔 농촌을 구경갈 때 야박하지 않도록 시골 사람들이 흙 속에 묻혀 죽은 듯 살아달라는 도시인들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순박함으로 포장하고 우직함으로 추켜세워 잔뜩 신뢰를 보낼 것 같지만 그들은 그런 가치를 결코 자신들의 미덕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시골은 바라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은 무시된다.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영악스럽지 않아야 때가 되면 언제든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만은 그저 가끔 놀러가 바라보기 위해서 고향은 늘 어머니 품속 같다고 말할 뿐이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그렇다. 어머니의 품속이 따뜻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툭하면 모성애를 들먹이는 것은 매우 의심스러운 일이다. 온갖 궂은일에 치여서도 자식 뒷바라지에 목숨거는 여성들의 미덕에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이 붙는 뒤에는 남자들의 남근주의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위대한 여성의 희생이 자신들의 무책임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의심스럽다면 아직까지 탁아소 제도를 만들고 설치하는 데 예산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린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된다. 그들에게 여성의 사회진출을 찬동하는 것은 개인의 의사에 따른 문제로만 생각하면 그뿐이며 자식을 보살피는 일은 위대한 모성애로 추켜세우면 만사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효’를 말하기는 더 꺼림칙하다. 부모를 내다버린 자식을 비난하며 사라져가는 효를 개탄할 때는 자식의 양육과 노인의 복지를 몽땅 개인의 도덕적 책임으로 몰아붙이려는 사회의 제도적 음모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도덕심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앞세워 시시때때로 모성애와 효를 퍼뜨리면 거기에 드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심각한 음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동심’과 ‘천사 같은 아이들’ 운운하며 입에 발린 거짓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은 천사를 두들겨패고 싶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며,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고 말하면서 전통과 민족을 들먹이면 지금 우리 것과 옛날 우리 것을 혼동하는 사람이 아닌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렇게 일상적인 말들만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학문과 문화의 공간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말들은 예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예술은 영원하다’라거나, ‘영혼을 불사르는 정신세계’ 운운하는 말들 속에는 보통 사람들은 하염없이 단세포적이거나 정신을 놓고 사는 얼빠진 인간쯤으로 매도하고 싶어하는 불가지론의 음모가 작동하고 있다. 육체노동이 ‘단순노동’이면 정신노동은 ‘복잡노동’인지 몰라도 심오하고 알 수 없는 정신의 세계 운운하지 않으면 그 복잡노동이 얼마나 단순한지를 너무 빨리 알아차려버리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자신이 음모의 주체라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데 있다. 때로 그런 예술의 깊이를 ‘아는 만큼 보이리라’라고 말한다면 학문 속에 슬쩍 몸을 숨기고 지식으로 권력을 부리려는 속셈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좋은 건 개도 아는 법.
말은 사회적 장치
이렇듯 부정할 말들의 목록은 한도 끝도 없이 늘어간다. 그러다보니 조심할 일이나 무심코 쓰는 말들 뒤에서 누군가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음모가 꼭 거대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말이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람이 만든 사회적 장치다. 그게 아름답고 좋은 말일수록 그걸 쓸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의심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들리는 말마다 이렇듯 의심하고 회의한대서야 어디 도무지 마음놓고 살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아무래도 증세가 더 심해지기 전에 오늘은 정신병원에 가보아야 할 것 같다. 아니면 그런 말들을 모두 정신병원에 처넣든지.
김진송/ 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