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선장·선원 15명에 대한 첫 재판이 지난 6월10일 광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열리고 있다. 10월21일 선장·선원들에 대한 결심공판이 진행되며 11월 중순 1심 선고가 있을 예정이다. 사진공동취재단
검사: 조타기를 우현이든 좌현이든 15도에 가만히 두었나? 조씨: 그렇다. 손잡이를 잡고 있었고, 조타기 앞이 아니라 옆면에 가 있었다. 검사: 조타기에 손댄 사람은 피고인 말고 없나? 조씨: 없다. 검사: 동영상을 보면 세월호 러더(방향키)가 딱 가운데 멈춰 있다. 러더는 조타기로 조작하지 않는 한 조류 영향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러더가 조타기를 0도로 잡았을 때 위치에서 멈춰 있다면 가장 마지막까지 조타기를 움직인 피고인이 조작한 거 아닌가? 조씨: 아니다. 배가 넘어간 상태에서 엔진을 정지시키고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선 핸들 조작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 조작을 안 했다. 부상당한 동료 두고 빠져나온 기관장 10월2일 광주지법 형사13부(부장판사 임정엽) 심리로 열린 청해진해운 임직원, 화물 하역업체 관계자 등에 대한 12회 공판에서는 조씨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증언이 있었다. 세월호 화물 선적 및 고박을 담당한 우련통운 쪽 피고인들이 증인으로 신청한 해기사 출신 ㅎ해상보험업체 김아무개 대표는 “(조타수가) 과도한 타를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세월호 침몰의 근본 원인은 타를 5도만 움직여도 배가 넘어갈 정도의 ‘복원성 상실’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검찰은 실제 조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증언으로 객관성에 문제가 있다고 반박했다. 세월호 기관장 박아무개(54)씨는 살인 혐의로 기소된 4명 가운데 1명이다. 9월30일~10월1일 이틀간 박씨에 대한 피고인신문이 이어졌다. 기관장을 비롯한 선원 10명은 참고인 신분으로 해경 조사를 받을 당시, 전남 목포 지역의 한 모텔에 함께 투숙한 사실이 알려져 부실수사 논란이 있었다. 당시 박씨는 해경이 잡아준 여관에 머물면서도 청해진해운 임직원들과 자유롭게 만났다고 진술했다. 그가 만난 임직원들 중 안아무개(60·구속)씨는 선박안전법 위반, 업무상 과실선박매몰 등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박씨는 4월16일 아침 8시30분께 조타실로 올라가 사고 현장을 지켜본 목격자이기도 하다. 처음 조타실로 향했을 때 선장, 3등 항해사, 조타수 3명이 있었다. 잠깐 대화를 나누던 선장은 조타실을 빠져나갔다. 이후 그는 선장 선실을 찾았다. 사고 무렵 선장은 침대에 기댄 채 속옷 차림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고 했다. 박씨는 사고가 발생하자 조타실 내 전화로 두 차례 기관실에 연락했다. 자의적 판단으로 기관부원들에게 기관실에서 나갈 것을 지시했다. 오전 9시5분께, 4층 선원 전용 복도를 거쳐 3층 기관부 선실로 향했다. 단원고 학생들이 대기 중이던 4층 승객 선실 쪽으로는 가지 않았다. 기관실 안쪽에 위치한 비상발전기 전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밖엔 못했다는 것이다. 조타실에서 나와 몇 분 뒤, 3층 기관부 선실 쪽에 도착했다. 비상발전기 쪽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기관부원 전원은 3층 선실 앞 복도에서 30분가량 대기하다 해경이 도착할 무렵 세월호를 빠져나왔다. 조타실로부터 따로 지시를 받지 않았다. 박씨는 대기 중이던 복도에서 맥주를 마신 사실을 인정했다. 조리원이 굴러떨어지는 등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누군가 건넨 캔맥주를 한두 모금 마셨다고 주장했다. 당시 3층 복도에는 다친 조리원 2명이 있었으나 이들에 대한 별도의 구조 조처는 없었다. “조타실에서 알아서 할 걸로 생각” 검사: 피고인은 배가 기울면서 미끄러지기까지 했다는데, 승객들이 다치거나 기울어서 당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박씨: 나도 일말의 사람인데, 왜 그런 생각이 없었겠나. 조타실에서 알아서 할 것으로 생각했다. 검사: 기관부원들한테 탈출을 지시했나? 박씨: 하지 않았다. 누가 손을 잡으라고 그래서 내가 제일 앞에서 먼저 나오게 됐다. 검사: 복도에 환자 2명이 있다고 해경에 말했나? 박씨: 정신없어서 못했다. 신문 말미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는 변호인의 질문에 박씨는 흐느끼며 말했다. “나도 지체장애가 있는 자식이 있다. 희생된 아이들을 생각하면 잠 한숨, 밥 한 숟갈 마음 편히 할 수 없었다. 천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고. 돌이킬 수 없지만 죽을죄를 지었다.” 광주=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