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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극에서 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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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1-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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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며 연임까지 했지만, 능력이나 비전은 평균에 비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는 재임 시절 “내가 2차대전 참전했을 때는…”이라며 영화에서의 경험을 진짜처럼 말하기도 해 그때부터 치매기가 있었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영화배우 출신인 그가 그런데도 성공적인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것은 이미지 덕분입니다. 그는 기뻐해야 할 때 기뻐했고, 슬퍼해야 할 때 더없이 슬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특유의 제스처로 텔레비전을 보는 국민들에게 편안함,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레이건이 가장 ‘대통령다운(President-like) 대통령’이었다고 평을 합니다.

폼만 잡았지만, 좋은 이미지를 주는 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정치인에게 이미지는 생명이고 이미지가 현실보다 더 리얼한 현실을 구축합니다.

하버마스는 이를 두고 오늘날의 정치는 테크노크라시로 전락했으며, 리더는 연기만 잘하면 되는 존재가 됐다고 비판했습니다. 그 결과 정치인은 비전없이 이미지만 갖고 정치를 하며 경제논리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고 지적합니다.

어쨌든 이미지가 정치의 한축을 이루는 것이 전자매체시대의 현실입니다. 정치인은 그 이미지만으로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민주당의 동교동계는 오랜 기간 반독재 투쟁을 벌이며 김대중 대통령을 보필해 한동안 불굴의 민주투사 이미지를 심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극에서 극으로, 끼리끼리 해먹는 패거리의 이미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죽어서도 충성 하나로 대통령을 모신다는 각오로 숱한 연금과 옥고를 치르고 고문과 회유 협박을 물리치며 오늘까지 왔다. 오죽하면 자식들에게 묘비명에 단 한줄, 김대중씨의 비서실장이라는 말만 적어 달라고 했을까.”

그런 동교동계는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항변하지만, 그럴수록 안쓰러운 모습입니다. 잘잘못을 떠나 빛바랜 이미지가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같은 당 안에서 인사개입, 비리의혹을 거론하며 쇄신요구를 끊임없이 하는 판이니 여론조작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지지율이 90%까지 올랐다가 정권 말기에 10%대로 추락했습니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아들과 가신들의 폐단에 진절머리를 쳤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집권하면 어떤 공직도 갖지 않겠다”고 결의를 다졌던 동교동 가신들은 권력의 오른팔이 됐고, 권력을 가진 만큼 자신들과 당과 대통령의 이미지를 끌어내리는 데 기여해 왔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몰린 김 대통령은 동교동계와의 관계를 ‘커밍아웃’하고, 자신의 옷에 붙기 시작한 동교동계의 이미지를 털어내야 합니다.

이미지에만 기대는 것도 문제지만, 이미지 따위에 상관않겠다면 더욱 볼썽사나워질 것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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