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농작물에서 황금열매 따련다”

382
등록 : 2001-10-31 00:00 수정 :

크게 작게

한국농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벤처농업인들의 실험과 희망만들기

사진/ 한국 농업의 대안이 영글어가고 있다. 벤처노업대학에 초빙된 외부 강사가 인터넷 소핑몰 운영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양쪽에 축구골대를 갖춘 자그마한 운동장 곳곳에는 이름모를 잡풀들이 돋아나 있었다. 운동장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미끄럼틀, 그네, 정글짐, 어른 허리쯤에나 닿을 듯 나직한 철봉에는 어느 것 할 것 없이 잔뜩 녹이 슬었다. 그래도, 가로로 길게 누운 1층짜리 건물 앞 화단의 향나무는 금방 이발을 한 듯 단정하게 정리돼 이곳이 아주 방치돼 있는 것은 아님을 짐작게 했다.

충남 금산군 제원면 저곡리 금강초등학교.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 지난 99년 문을 닫은 이 학교에는 올해 4월 새로운 문패가 내걸렸다. ‘한국벤처농업대학’(명예학장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물론 공식적인 교육기관은 아니며 농업인들의 모임 성격이 강하다. 이 학교에서는 다달이 한번씩 열띤 강의와 토론이 벌어진다. 10월 행사는 가을비가 촉촉히 내린 27일에 열렸다. 지난 5월 첫 강의가 있었으니 어느 덧 여섯 번째.

벤처농업대학에 모인 농업기술인들


강의가 예정된 오후 3시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경북 문경에서 사과농사를 짓는다는 40대 아주머니, 충남 금산에서 인삼농사를 하는 60대 아저씨, 강원도 홍천에서 유기농법으로 쌀을 재배하는 농민…. 모두 이 대학의 학생들이다.

벤처농업대학 설립을 주도한 민승규 박사(삼성경제연구소)는 “우리 대학에는 40∼50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제주도를 뺀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골고루 섞여 있다”고 말했다. 민 박사는 “정부에 의존하는 농업이 아닌, 개개인의 창의력이 중시되는 농업으로 발전시키고 그 토대를 정착시키려는 것”이라고 대학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농업인들에게 사업전략 및 마케팅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는 설명이다.

교실 두칸을 합쳐 만든 강의실에는 40개 안팎의 이동식 의자가 놓였는데, 처음에는 듬성듬성 빈자리가 많았다. 민 박사를 비롯한 행사 주최쪽은 “추수철이어서 많이들 못 오시는 것 같다”며 걱정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빈자리가 모두 채워지자 금세 얼굴이 밝아졌다.

참여하고 있는 농민들은 단순한 ‘농사꾼’이 아니라 ‘농업기술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햅쌀처럼 단맛이 나고 신선도가 높은 ‘5˚C 이온쌀’을 개발한 풍년농산 나준순 사장, 2∼3년이면 썩어버리는 도라지를 30년까지 키울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장생도라지의 이영춘 사장, 인삼이나 매실을 혼합한 초콜릿을 개발해 인기를 끌고 있는 (주)본정 이종태 사장….

‘인터넷 쇼핑몰 성공전략’(서강호 삼성물산 상무), ‘신제품 개발전략과 성공사례’(나종호 (주)Q&A마케팅센터 사장), ‘성공하는 리더십: 꿈, 행동 그리고 겸손’(이언오 삼성경제연구소 상무) 등 외부 전문가 강의에 이어 성공사례 발표가 시작될 즈음엔 벌써 밤 9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이날 성공사례 발표에 나선 이는 통영관상조류농원의 설재홍 사장. 척수장애인(3급)인 설 사장은 군복무를 마치고 기업에 입사하려고 했으나 번번이 면접에서 쓴 잔을 마셨다. 실의에 빠져 있던 중 말벗이 필요해 십자매 한쌍을 구입한 게 계기가 돼 86년부터 경남 통영에서 관상조류 사업을 시작했다. 연탄가스로 새가 죽어나고 비닐하우스에 불이 나 키우던 새를 모두 잃는 등 온갖 역경을 딛고 지금은 한해 2억∼3억원의 수익을 올릴 정도로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 80종 안팎의 온갖 새들을 갖춰 한국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제 눈에는 예, 돈 벌 수 있는 길이 ‘억수로’ 마이(많이) 보인다 아임니꺼.” 어눌한 듯하면서도 경험에서 우러난 설득력 있는 그의 강의에 농민들은 때로는 폭소를 터뜨리다가 일순간 숙연해지기도 했다.

벤처농업대학은 외부 강사를 초빙해 강의를 듣는 일방적인 교육에 머물지 않는다. 서로가 갖고 있는 농업기술을 교류하고 공동으로 판매전략을 펼치는 터전이기도 하다. 각자가 갖고 있는 노하우를 공개해 시너지 효과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일부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홍쌍리씨가 경영하는 청매실농원(전남 광양)과 인삼초콜릿 전문점인 본정(충북 청주)은 청매실초콜릿을 공동으로 개발, 판매처를 뚫고 있다. 인삼초콜릿 개발업자, 민속주 제조업자, 쌀 농사를 짓는 농민은 ‘세컨드’라는 공동 브랜드를 개발하기도 했다. 한국벤처농업대학 차원의 브랜드도 준비돼 있다. 칠월칠석날(음력 7월7일)에는 사랑하는 사이끼리 우리 농산물을 선물하자는 뜻으로 ‘견우직녀의 날’을 선정하고 견우, 직녀를 형상화한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 이 캐릭터 개발에는 ‘88올림픽’의 마스코트 ‘호돌이’를 디자인한 김현씨가 자원봉사 형식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성공 노하우 공유하며 공동 브랜드도

사진/ 벤처농업대학은 창의력이 중시되는 농업을 일구고 있다. 이곳의 강의와 토론은 밤늦게까지 이어진다.
민 박사는 “농업에는 혁명이 있을 수 없으며 성공사례를 자꾸 만들어 확산시켜나가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스포츠, 연예계의 스타처럼 농업계에서도 스타가 자꾸 나와야 하며 그게 농업이 한 단계 발전하는 길이라는 설명이다.

농업에 대한 민 박사의 애정은 아주 어릴 적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아버지 고향은 경남 진주이나 전 서울 태생이거든요. 그런데도 어쩐지 시골이 좋았습니다. 시골에만 내려가면 마음이 편안하고… 막연하게나마 농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대학·대학원에서 농업경제학을 전공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박사(일본 도쿄대)학위 논문이 쌀문제에 관한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이런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박사과정을 끝낸 민 박사는 한때 대기업 계열 경제연구소에 들어갈 생각을 품기도 했지만 경기도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청(이하 농진청)으로 진로를 정했다. 일본인 지도교수한테서 혼쭐이 난 뒤 현장감각을 익힐 수 있는 곳을 선택했던 것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곳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쌀문제에 관한 논문을 한편 썼지만 민감한 사안이었던 때문인지 발표를 못하게 하더군요. 관료조직에 대한 염증을 느꼈습니다.” 농진청을 그만둘 결심을 하고 있던 터에 우연찮게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박사 인력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됐다. 한해도 채우지 못하고 농진청 생활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농진청 경험은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현장감을 익힐 수 있는 기회였을 뿐 아니라 그때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벤처농업대학 일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다. 직속상관이었던 정아무개 국장은 퇴직 전 몇달간 자주 지방출장을 갈 수 있도록 배려해줌으로써 농업계 전반에 촘촘한 인적 네트워크를 짜는 데 보탬을 줬다.

“삼성경제연구소에 온 직후였으니까 95년 봄이었을 겁니다. 유치원생이던 아들을 데리고 농진청 뒷산에 있는 우장춘 박사 묘소를 우연히 들렀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때 한 다짐이 있습니다. ‘농촌을 위해 살다가 우장춘 박사 묘소 근방에 묻히는 걸 소원으로 삼자’고.”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아들은 지금도 그때 그 말을 기억하며 가끔씩 놀림조로 그를 일깨운다고 한다.

삼성경제연구소에 온 뒤라고 모든 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농업문제를 전문으로 연구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연구소는 지역경제 전문가로 민 박사를 뽑았던 것이다. 농업 연구는 부수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농업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다행히 삼성그룹 전체적으로 ‘7·4제’(오전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가 실시돼 오후에 따로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농림부, 농진청 등 농업 관계기관을 찾아 사람들을 만나고 자료를 모으는 일이 2∼3년간 계속됐다. 이와 함께 농촌 현장을 찾아다니는 일을 병행했다. 전국 각지의 과수원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는 조직을 꾸려 농민들의 일을 돕고 아울러 현장감을 익혔다. 또 연구소쪽의 도움을 얻어 농촌지역 주민들에게 컴퓨터 교육을 시키는 활동도 펼쳤다. “봉사한다는 생각보다 저 스스로 배우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현장감각은 직접 만나고 부대끼는 과정에서 생기지 않겠습니까.”

벤처농업은 유력한 대안이 될 건가

사진/ "농업은 첨단산업이다." 벤처농업대학 설립을 주도한 삼성경제연구소 민승규 박사.
민 박사는 다양한 형태의 농촌봉사 활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농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사회 각계에 깊이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사회 각 분야와 연결할 수 있는 농업인들의 모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올해 들어 벤처농업인들의 온라인 모임인 한국벤처농업포럼(www.vaf21.com)을 개설했다. 이는 농민들을 위한 사이버 공동체일 뿐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는 장터이기도 하다. 포럼 개설과 함께 오프라인 공동체인 벤처농업대학이 설립됨으로써 민 박사의 ‘실험’은 또다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벤처농업이 한국농업의 ‘유일한’ 대안은 아니지만, ‘유력한’ 대안 가운데 하나는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튿날로 예정된 토론 과정을 하루 앞당겨 실시하는 바람에 이날 일정이 끝났을 때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제법 굵은 빗줄기로 운동장은 질척거렸지만 밤공기는 더없이 상쾌했다.

금산=글·사진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