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도 안돼 나동그라진 손원제 기자의 장애인 체험… 황당하고 열 받는 가운데 깨달았으니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 빠져든 뒤 신기한 마법 약과 음식을 먹을 때마다 키가 커지거나 줄어들었고, 그때마다 온갖 위험한 일들을 겪곤 했다. 나는 잠깐 동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두발로 평탄하게 서 있던 내가 일단 휠체어에 올라타자마자 세상의 모든 길과 턱과 문들은 이전과 너무도 달라졌다.
10cm도 안 되는 턱들은 온몸의 근육을 동원해서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으스스한 장벽으로 바뀌었다. 계단으로 둘러싸인 건물들은 불가침의 요새처럼 나를 압도했다. 평평한 인도는 어느새 잠시도 신경을 놓을 수 없는 거칠고 가파른 길로 변해 있었다. 그 경험은 황당하면서 당혹스러웠고 기분 나빴다. 하지만 이를 통해 많은 이웃들이 속절없이 이상한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됐다.
교만함, 초장부터 깨지다
10월12일 오전 10시50분께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쉰 뒤 휠체어에 올랐다. “지금부터는 절대로 두발을 써서는 안 됩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www.cowalk.or.kr, 02-521-5364)의 여준민 간사가 휠체어장애체험의 몇 가지 원칙을 들려줬다. 가능한 자기 힘으로 휠체어를 움직일 것, 도움을 청할 때는 자신의 처지를 적절히 설명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할 것. 나 같은 장애체험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발을 쓰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선 장애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경고도 함께였다. 뜻밖에 휠체어는 잘 굴러가는 듯했다. 손목에 조금 힘을 줬더니 연구소 복도 위를 쭉쭉 미끄러졌다. “꽤 비싼 거예요.” 여씨는 내가 탄 휠체어가 80만원쯤 한다고 했다. 손으로 굴리는 수동휠체어 값은 30만원대에서 100만원대까지 천차만별이다. 전동휠체어는 싼 게 200만원을 훌쩍 넘는다. 그러나 일자리와 소득이 없는 가난한 장애인들에겐 더 잘 굴러가는 비싼 휠체어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여씨는 “휠체어 보조금이 있지만, 기초생활보장대상자에 한해 5년마다 한번 24만원 정도를 줄 뿐”이라고 말했다. 2000년 장애인 실태조사에서 휠체어 등 보장구를 갖고 있는 장애인은 30%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배경설명을 들으면서도 내겐 순간적으로 ‘이 정도면…’ 하는 교만함이 스쳐갔다. 여유로워진 나는 어느새 기사의 첫머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래, 휠체어를 벗고 나니 내가 장애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다, 따위로 끝나는 기사는 절대 쓰지 않겠다는 게 나의 첫 다짐이었다, 정도로 기사의 리드를 잡아야지.’ 장애체험이란 것이 자칫 동정과 연민으로 시작해 자기 위안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무엇보다 그 정도면 기사의 시작으로선 꽤 ‘쿨’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휠체어째 들어줄 땐 반드시 거꾸로!
그러나 내 이런 계산이 너무도 한가한 것이었음을 깨닫기까진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1시4분께 나는 여씨의 배웅을 뒤로 한 채 연구소 건물을 나섰다. 건물 입구엔 약간의 턱이 있었고, 그 위에 휠체어 사용자를 위해서인 듯 철판으로 된 경사각이 놓여 있었다. ‘첫 고비군.’ 잠깐 긴장한 뒤 살짝 휠체어를 밀고 ‘경사각을 내려섰다’고 생각한 찰나 내 몸은 이미 길바닥에 철퍼덕 널브러져 있었다. 욱신거리는 팔꿈치보다 첫 출발에 닥친 불운이 좀전의 자신감을 세차게 타격한 게 더욱 아려왔다. 경비아저씨가 달려와 휠체어에 앉혀줬다. 발을 써선 안 된다는 원칙만은 그래도 지킨 셈이다. 의혹이 밀려왔다. ‘이거 장애인단체 건물에 경사각이 너무 급한 것 아냐.’ “아이구, 여기서 이렇게 넘어지는 사람들 많지 않나요.” “글쎄, 많이들 다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
전열을 가다듬은 나는 다시 휠체어를 굴리기 시작했다. 연구소에서 지하철 2호선 방배역까지는 400m 정도. 방배역에서 사당으로 가 4호선으로, 다시 삼각지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고 공덕역에서 내려 회사로 이동하는 동선을 택했다. 복잡해보여도 사실 다른 선택이 없었다. 자가용이나 택시를 잡아타는 것말고는 지하철이 장애인의 유일한 이동수단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반버스는 계단 때문에 휠체어의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최근 지체장애인들이 장애인이동권을 요구하며 휠체어를 버스에 쇠사슬로 묶고 농성을 벌인 사건은 대중교통수단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장애인들의 열악한 현실을 생생히 보여줬다. 출입구를 낮춘 저상버스가 도입되기 전까지 장애인들의 동선은 깊은 땅 속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걸어서라면 5분거리도 채 안 될 방배역 앞에 도착한 시각은 11시15분께. 두팔의 근육은 뻣뻣해져 있었다. 손바닥엔 작은 물집까지 맺히려 했다. 가장 큰 문제는 휠체어가 자꾸 차도쪽으로 쏠린다는 점이었다. 인도는 물이 빠지도록 차도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지게 설계돼 있다. 그런데 이 약간의 경사가 내겐 약간이 아니었다. 아무리 용을 써봐도 바퀴는 자꾸 차도쪽으로 굴러내려갔다. 바로 옆에서 쌩하고 달리는 차들의 속도감은 몇 차례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방배역에서 나는 다시 한번 당혹스러움을 맛봐야 했다. 빽빽한 계단뿐,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리프트는 어디에도 없었다. 고민하던 나는 배낭을 맨 20대 청년에게 부탁했다. “밖에 장애인이 있다고 역무원에게 좀 전해주시겠어요.” 몇분을 기다린 뒤 역무원 2명이 올라왔다. 행인 둘이 합세해서야 겨우 나는 휠체어째 들려 역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들려서 계단을 내려갈 때는 휠체어를 뒤로 돌려 들어야 한다. 그래야 장애인이 등받침대에 기댈 수 있어 떨어지지 않는다. 여준민 간사는 “계단에서 도움을 받을 때는 꼭 그 점을 알려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비장애인들은 도와주려는 선의만 있을 뿐, 그런 세세한 점까진 모른다는 것이다. 이후 몇 차례 더 도움을 받을 때마다 나는 여 간사의 조언을 충실히 따랐다. 시민들이 처음부터 나를 돌려서 들어준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역무원들도 “못할 노릇”
방배역 탑승장에 내린 시간은 11시25분. 계단을 내려오는 데만 10분이 걸렸다. 계속 도움을 청하고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도움을 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야 당연하다고 해도, 제대로 시설만 설치돼 있었다면 굳이 그런 번거로움을 겪을 필요도, 마음 한켠에 빚을 쌓는 듯한 껄끄러움도 없었을 터이다. 시설의 미비야말로 장애인을 의타적 존재로 남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만 불편한 것도 아니다. 한 역무원은 “5호선부터는 엘리베이터나 리프트 등 장애인시설이 갖춰진 편이지만, 방배역만 해도 오래 전에 지어져 리프트조차 없다”며 “매일 한두명씩은 들어달라는데, 우리도 못할 노릇”이라고 털어놓았다.
한 정거장 거리의 사당역에도 환승을 위한 리프트나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나는 다시 공익요원과 승객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11시35분, 나는 4호선으로 갈아탔다.
삼각지역은 2기 지하철역답게 환승시설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었다. 환승통로엔 계단 아닌 경사로가 설치돼 있었다. 6호선 입구 계단 옆의 리프트도 경사가 높아 좀 겁나긴 했지만, 작동에 큰 문제는 없었다. 2기 지하철엔 또 차량 2대마다 하나꼴로 장애인 탑승구가 설치돼 있었다. 한쪽 의자를 들어내고 휠체어를 댈 수 있게 했다. 그곳에 들어서자 나도 모르게 “휴” 하고 한숨이 새나왔다.
공덕역에 내려선 택시를 잡아탔다. 회사까지 500m가 채 안 되지만, 완만한 오르막길인 탓에 휠체어를 끌고 가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만만한 게 없었다. 다리를 못 쓰는 나는 택시기사와 길가던 두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뒷자리에 올랐다. 택시기사가 내려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는 등 굳은 일을 해야 하는 탓에 장애인들은 택시잡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택시가 앞에 와 섰다가도 장애인이 기사의 도움을 기다리며 가만히 서 있으면 ‘붕’ 하고 그냥 떠나기 일쑤라는 것이다. 나는 한번만에 택시를 타는 행운을 누렸다. 12시25분, 연구소를 떠난 지 81분 만에 나는 회사 입구에 도착했다.
회사엔 1층부터 엘리베이터가 있어 오르내리는 데는 큰 불편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화장실이 문제였다. 9층 건물 어디에도 장애인용 화장실이 없었다. 나도 이번에야 처음 안 사실이었다. 장애인용 화장실은 휠체어 때문에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만, 회사 화장실은 좌변기 입구부터 휠체어에 비해 턱없이 좁았다.
화장실에서 선배에게 배신당하다
이날 나는 회사에서 두번 화장실을 다녀왔다. 처음엔 사회팀 김창석 기자의 도움을 받았다.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그는, 그러나 나를 좌변기 위에 올려놓고는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나오려고 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누구 없냐”고 소리를 지르기도 민망한 일이었다. 나는 결국 기어기어 휠체어에 올라탔다. 그 과정에서 두 다리에 약간의 힘이 들어가고 머리엔 열이 올랐음을 인정해야겠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아이구, 깜빡 했네.” 좀 성질이 난 내게 입사 3년 선배인 그는 기사에 이름만은 넣지 말라며 ‘로비’를 했다. 그러나 나는 기록을 위해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기로 했다.
사실 그로선 억울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장애인 화장실조차 갖추지 않은 회사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본적 생리현상이 극도로 제약되는 구조에서 어떻게 인권이며 기본권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공공 시설물의 무책임을 정말 제대로 실감한 건 그날로부터 닷새가 지나서였다. 12일 하룻동안의 체험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나는 17일 오전 11시20분께 광화문으로 나갔다.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을 들렀다가 길 건너 교보문고에서 신간서적들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문화팀 기자로서 서울 중심부 문화거리의 장애인 이동권 현황을 직접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았다.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선 인터넷 서예·문인화 대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로 길가쪽으론 장애인이 들어설 통로가 아예 없었다. 10여분을 헤매고서야 직원에게 뒤쪽 주차장쪽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디든지 통로가 있다는 표시라도 돼 있다면…’ 했던 아쉬움은 곧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통로로 내려갔지만, 문은 꼭꼭 닫혀 있었다. 불도 꺼져 있었다. 한참만에 열쇠를 가져온 경비원은 “원래 열어둬야 하는데, 도난방지를 위해 전시회 주최쪽에서 잠갔다”고 말했다. “늘 이런 식인가요.”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필요하면 우리가 열어주고 그래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지고 만 것 같다는 느낌은 미술관을 나와 한층 증폭됐다. 교보문고로 건너기 위해 어렵사리 휠체어를 몰고 광화문 사거리로 갔다. 그러나 5호선 전철역과 연결된 광화문역 7번 입구엔 리프트도, 엘리베이터도 찾아볼 수 없었다. 5호선 입구라 장애인 시설이 설치돼 있으리라 믿었던 게 잘못이었다. 사방 어디에도 건널 곳은 없었다.
‘참, 세종문화회관 뒤쪽 광화문역 입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었지.’ 기수를 돌려 달려온 거리만큼 다시 바퀴를 굴렸다. 그곳도 지하통로가 따로 연결돼 있지 않았다. 세종로를 건너려면 지하철 개찰구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가야 했다.
절망의 리프트
이윽고 역 안. ‘리프트가 있으니까’ 하고 쉽게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첫 번째 리프트부터 작동할 기색이 없었다. 몇번을 시도하다 비상벨을 눌렀다. 5분쯤 지났을까. 나이 지긋한 역무원이 다가왔다. 김재식 부역장이었다. 점심시간이라 근무자가 없어 오래 걸렸다고 했다. “자주 이렇게 고장이 나나요?” “원래 리프트가 수동휠체어 무게에 맞춰 설계됐는데, 요즘 전동휠체어들을 많이 타고 다니다보니, 자주 과부하가 걸리는 것 같네요.”
그가 버튼을 눌렀다 말았다를 몇번 하자 갑자기 리프트가 움직였다. 좋아한 것도 잠시, 이번엔 저쪽 출구계단용 리프트가 요지부동이었다. 다시 호출 벨을 눌렀다. 김씨의 임기응변으로 리프트가 움직였다. 그러나 모서리를 돌자 또다시 계단과 함께 리프트가 나타났다. 아예 나를 따라온 김씨가 온갖 수를 다해봐도 세 번째 리프트는 꼼짝을 안 했다. 그가 뒤에서 휠체어를 받친 채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곡예가 벌어졌다. 마지막 하나까지 말썽이었다. 처음엔 발판이 펴지지 않았다. 어찌어찌 올라탔지만, 서야 할 곳에서 서지 않았다. 교보문고로 들어서는 중간 출입구에서 내려야 했지만, 리프트는 막무가내로 올라갈 기세였다. 억지로 발판을 세우고 나를 내리는 김씨의 수고를 지켜보며 나는 마침내 절망했다. 오후 1시20분. 11시57분 세종문화회관을 나선 지 1시간23분만이었다.
그제서야 첫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현준 간사가 들려준 말이 떠올랐다. 그도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이다. “리프트도 결코 좋은 시설이 아닙니다. 고장도 잘 나고 심지어는 중간에 서기도 합니다. 심야에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꼼짝없이 공포에 떨어야 합니다.” 여준민 간사의 말도 되새겨졌다. “정부는 2006년까지 모든 공공시설에 엘리베이터나 리프트를 설치할 계획이랍니다. 하지만 장애우들을 오히려 불편하게 하는 리프트 대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도록 모든 설계를 바꿔야 합니다.”
휠체어를 돌려주고 어느덧 나는 이상한 나라를 슬며시 빠져나왔다. 세상의 턱들이 다시 낮아졌다. 그러나 마치 아득한 터널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듯했던 그때의 느낌에선 여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국내 장애인은 모두 144만9496명. 95년보다 39만6천여명(약 27%)이 늘어난 숫자다. 이 가운데 89.4%가 교통사고 등에 의한 중도장애인이다. 우리는 너무 쉬이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언제고 누구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글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건물을 나서는 순간 휠체어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10월12일 오전 10시50분께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쉰 뒤 휠체어에 올랐다. “지금부터는 절대로 두발을 써서는 안 됩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www.cowalk.or.kr, 02-521-5364)의 여준민 간사가 휠체어장애체험의 몇 가지 원칙을 들려줬다. 가능한 자기 힘으로 휠체어를 움직일 것, 도움을 청할 때는 자신의 처지를 적절히 설명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할 것. 나 같은 장애체험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발을 쓰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선 장애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경고도 함께였다. 뜻밖에 휠체어는 잘 굴러가는 듯했다. 손목에 조금 힘을 줬더니 연구소 복도 위를 쭉쭉 미끄러졌다. “꽤 비싼 거예요.” 여씨는 내가 탄 휠체어가 80만원쯤 한다고 했다. 손으로 굴리는 수동휠체어 값은 30만원대에서 100만원대까지 천차만별이다. 전동휠체어는 싼 게 200만원을 훌쩍 넘는다. 그러나 일자리와 소득이 없는 가난한 장애인들에겐 더 잘 굴러가는 비싼 휠체어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여씨는 “휠체어 보조금이 있지만, 기초생활보장대상자에 한해 5년마다 한번 24만원 정도를 줄 뿐”이라고 말했다. 2000년 장애인 실태조사에서 휠체어 등 보장구를 갖고 있는 장애인은 30%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배경설명을 들으면서도 내겐 순간적으로 ‘이 정도면…’ 하는 교만함이 스쳐갔다. 여유로워진 나는 어느새 기사의 첫머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래, 휠체어를 벗고 나니 내가 장애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다, 따위로 끝나는 기사는 절대 쓰지 않겠다는 게 나의 첫 다짐이었다, 정도로 기사의 리드를 잡아야지.’ 장애체험이란 것이 자칫 동정과 연민으로 시작해 자기 위안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무엇보다 그 정도면 기사의 시작으로선 꽤 ‘쿨’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휠체어째 들어줄 땐 반드시 거꾸로!

당혹스러웠던 '이상한 나라'에서의 경험. 그러나 많은 이웃들이 이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해줬다.

지하철 6호선 삼각지역의 리프트는 다행히 별탈없이 움직였다.

길가던 아주머니 두분의 도움으로 간신히 택시를 잡고…

세종문화회관에서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통로로 내려갔지만 입구는 꽁꽁 봉쇄되어 있었다.

채 10cm 가 안 되는 얕은 턱도 거대한 장벽처럼 다가왔다.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