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돌뿌리에 관한 명상

324
등록 : 2000-08-29 00:00 수정 :

크게 작게

지난 한주는 등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 주였습니다. 첫째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관련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방 기자회견, 둘째는 윤철상 민주당 의원의 발언 파문 등 잇따라 터져나오는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너무나 진부한 표현이 돼버렸지만, 산행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위험하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반환점을 돌아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돌뿌리들이 여기저기서 돌출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접하면서는 등산과 관련해 한 가지 격언(?)을 추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전히 산에서 내려온 뒤에도 얼마든지 사고를 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김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에 대해서는 더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 한심한 인식수준을 가진 분에게 한때 통일정책의 최고결정권을 맡겼다는 점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하기야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것이 철학이었는데, 이제는 주변에 빌릴 머리도 없으니 오죽하겠는가 하는 측은한 마음도 듭니다. 그래서 관심의 초점은 이제 막 하산을 시작한 현직 대통령 문제에 쏠립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 돌뿌리에 걸려 휘청거리면 일단 돌뿌리부터 흘겨보게 마련입니다. 너는 꼭 있어도 되지 않을 자리에 있다가 나를 골탕먹이느냐고요. 그리고 돌뿌리에 걸려 골탕을 먹는 모습을 보고 고소해하는 사람들에게 원망과 짜증을 내게 됩니다. 아마 김 대통령이나 여권수뇌부의 생각도 비슷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도 ‘돌뿌리의 잘못’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고 싶겠지요.

그러나 돌뿌리가 그곳에 있는 것은 다 연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오히려 지금 김 대통령의 발목에 걸리는 돌뿌리는 여당 자신이 만들어놓은 것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따지고 보면 검찰이나 선관위 등 권력기관을 품안에 품고 싶어하는 여당의 속성은 크게 변한 것이 없습니다. 예전에 비해 그 강도가 현저히 낮아진 것도 인정해줄 만하고, 이번 사건의 정확한 진실이 무엇인지도 더 지켜봐야겠지만, 그래도 여당이 그런 유혹에서 결코 자유롭지만은 않았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찬바람 부는 야당 시절에는 권력기관에 번번이 당한다고 억울해하면서 절치부심했으나 권력을 잡고나서는 역시 급속히 여권체질로 바뀐 것입니다.

입으로는 정치개혁을 외치면서도 몸은 결코 따라주지 못하는 현실 역시 이미 돌뿌리를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선거비 과다지출에 대해 여당은 “그렇다면 너희들은?”이라고 야당을 향해 종주먹을 들이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돌아보아야 할 것은 자기자신이요, 남이야 어떻든 스스로 더욱 갈고 닦아야 하는 게 옳은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당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에 대한 해법도 분명합니다. 도망칠 비상구가 없나 두리번거리거나, 적당한 선에서 봉합하고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번 사태를 돌뿌리가 다시는 앞길을 가로막지 않도록 하산길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계기로 삼는 게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는 작은 돌뿌리 정도가 아니라 천길 낭떠러지를 만날지도 모르니까요.

한겨레21편집장 김종구 kjg@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