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8일 오후 5시30분께 전남 진도 팽목항. 세월호 참사로 막내아들을 잃은 두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잡고 노란 리본을 통과했다.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8반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56)씨와 누나 이아름(25)씨, 그리고 2학년4반 고 김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52)씨였다. 지난 7월8일 단원고를 출발한 이들은 길이 130cm, 무게 5kg의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21일간 걸었다. 470km(1200리)를 무려 90만 보의 걸음으로 밟아왔다.
하행 순례 마친 뒤 등 토닥이던 그 손
하루 20~30km씩 내리쬐는 햇볕에 이글거리는 아스팔트를 걷는 고된 여정이었다. 웅기군 아버지는 하행 순례길을 완주한 뒤 내게 다가와 등을 토닥거렸다. 새벽 5시부터 10시간씩 날마다 함께 걷고 먹으며 이야기했던 순간들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갔다. 지난 3주간 <한겨레21>은 유가족 순례단과 동행했다. 제1021호 표지이야기 ‘길 위에서’에서 다 하지 못한 뒷이야기를 풀어낸다.
[페이스북 인연] 7월8일 오후 4시께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배웅을 받고 나오는 두 아버지와 아름씨의 어깨는 무거웠다. 웅기군 아버지는 배낭을 멘 채 나무 십자가를 짊어졌다. 승현군 아버지는 깃발 ‘하루속히 가족 품으로’를 들었고, 아름씨는 커다란 가방과 작은 허리색을 둘러멨다. 이들은 땀 흡수가 잘되는 기능성 옷도 갖춰입었다. 38일간 머나먼 길을 떠나니까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단출했다. 21일 동안 동행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출발할 때는 언론사 10여 군데가 따라붙으며 카메라를 들이대더니 30분쯤 지나자 <한겨레21>만 남았다. 두 아버지와 어색한 침묵 속에 걸었다. 낯선 취재원과 기자였으니까.
말문은 페이스북에서 터졌다. 출발 전날인 7월7일 <한겨레21> 페이스북(www.facebook.com/hankyoreh21)으로 순례단 소식을 전했더니 페이스북 친구들이 함께하겠다고 난리였다. 멋모르고 공개한 내 휴대전화는 불이 났다. 후원 물품을 날짜·지역별로 분류하는 게 자연스레 내 몫이 됐다. 그날그날 일정을 결정하고 공지하는 일도 해야 했다. 시·군 경계가 바뀔 때마다 경찰은 내게 전화를 걸어 이동 경로를 파악했다. 언론들도 두 아버지와 인터뷰하고 싶다며 나를 찾았다. 나는 순례단의 ‘로드매니저’가 돼버렸다.
페이스북 친구들은 적극적이었다. 이상길(66)씨가 첫날 동행자로 나섰다가 저녁밥을 샀다. 둘쨋날(7월9일) 점심은 경기도 수원 이후교회의 김형권 전도사가 초대했다. 두 아버지와 함께 밥 먹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연락이 쏟아졌다. 아침 식사를 거른 채 새벽 5시부터 걸었다고 페이스북에 쓰자 아침밥을 싸오는 엄마들이 등장했다. 두 아버지가 “팥빙수가 먹고 싶다”고 적으면 아이스크림을 들고 누군가 찾아왔다. 이렇게 맺어지는 ‘길 위의 인연’에 두 아버지는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웅기군 아버지가 말했다. “출발할 때 사람들이 같이 오겠다는 걸 모두 말렸다. 중간중간에도 오지 말라고 뿌리쳤다. 그렇게 철저히 혼자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충남을 지나면서 내가 말릴 권한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걷는 사람들은 각자의 몫을 찾아냈다. 신부들이 교통을 통제하고 수녀들이 깃발을 들었다. 노동조합원들이 순례단의 짐을 차량에 싣고 앞장서서 호위했다. 아이쿱생협에선 간식을 준비했다. 중고생들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7월24일 경기도 수원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전남 함평으로 내려와 닷새간 순례길에 동행한 강봉춘(37)씨는 “망설이며 내려왔는데 길 위에서 치유가 됐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두 아버지의 십자가를 대신 들어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걷다보니 참여자들이 각자 십자가를 찾아서 나눠지고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뭉클했다.” “한마음으로 걸으니 답답함이 덜어졌다” 서울·부산·대전·광주 등 전국에서 시민들이 모여들어 7월27일 진도체육관에 들어설 때는 150여 명에 이르렀다. 학원 강사인 신영지(44)씨는 7월26일 전남 영암~해남 27km를 중학교 3학년생 아들 김서준(15)군과 함께 걸었다. 전날 부산에서 밤 11시에 출발해 밤새 운전하고 새벽 4시30분 출발지에 도착했다. 새벽 5시부터 10시간 동안 걸은 신씨는 “가슴에 슬픔이 가득한데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무기력했다. 아버지들과 한마음으로 걸으니까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고 했다. 부서진 십자가 7월15일 충남 논산에서 십자가가 부서졌다. 하루 10시간씩 아버지에게 매달려 흔들리다보니 십자가의 잇는 부분이 빠져버렸다. 웅기군 아버지는 십자가를 들고 목공소를 찾아내라고 다그쳤다. 그날 아침 충남 공주시 계룡면을 지날 때였다. 나무 의자를 예쁘게 만들어 야외에 전시해놓은 목조주택 건축회사(참솔건축)가 눈에 띄었다. 새로 이사간 집에 나무 의자를 사놓으려던 참이라 나는 연락처를 메모해뒀다.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 건축회사가 떠올랐다. ‘십자가도 고쳐줄 수 있을까.’ 나는 전화하며 걱정했다. 전후 사정을 들은 이유상 대표는 십자가를 가져오라고 했다. 십자가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접착제로 붙이면 다시 떨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방법은 십자가 뒤쪽에 나무판을 격자로 덧대는 것이었다. 그러면 무게가 1kg 늘어 6kg이 된다. 웅기군 아버지는 그러자고 했다. 무거워지더라도 십자가가 튼튼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 진도 팽목항을 거쳐 대전 월드컵경기장까지 800km(2천 리)를 짊어져야 하고, 둘째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선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혼과 고통, 시민의 바람이 담긴 십자가를 교황이 받는다면 세월호 진상 규명에 거대한 불씨가 댕겨질 것이라고 두 아버지는 믿었다.
건축회사는 십자가와 똑같은 너비와 길이로 나무를 잘라 뒤쪽에 붙였다. 그 나무를 십자가와 비슷한 색으로 칠해 덧댄 모양을 감췄다. 투명 페인트로 한 번 더 칠할 때까지 1시간 넘게 걸렸다. 내리쬐는 햇볕에 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십자가를 고쳤다. 다른 직원은 옥수수와 음료수를 내왔다. 정성스런 손길에 감탄하며 ‘얼마냐’고 물었다. “어떻게 돈으로 계산을 합니까.” 직원은 목멘 소리로 손사래를 쳤다.
두 아버지는 21일간 걸으며 십자가를 다른 사람에게 거의 넘기지 않았다. 문규현 신부만이 단 하루(7월20일) 대신 멨다. 문 신부는 “세월호 참사는 인간의 탐욕과 무능이 부른 이 세상의 죄인데 십자가는 그 죄의 표현”이라고 해석했다.
[느닷없는 위기] 도움의 손길이 쏟아지자 되레 위기가 몰아쳤다. 두 아버지의 허락 없이 유가족 순례단을 위한 후원금을 모집한다는 글이 인터넷에 떠다녔다. 누군가 ‘선의’로 시작한 일이지만 순례단은 크게 당황했다. 아름씨는 7월11일 일기를 썼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빨리, 많이 관심을 가져줘서 감사하다. 하지만 두 아버지가 원하는 후원은 땡볕에서 하염없이 걷고 있을 때 차 창문을 내리고 ‘힘내라’고, ‘잊지 않겠다’고 소리치는 것뿐이다. 더 바란다면 목마를 때 시원한 생수 한 병이면 족하다.” 당사자는 두 아버지에게 사과하고 후원금 모집 공고글을 삭제했다.
도대체 난 어떻게 하라고요
후원금 소동 탓에 유가족은 밤새 뒤척였다. 승현군 아버지는 40분밖에 못 잤고 아름씨는 꼬박 밤을 새웠다. 다음날(7월12일)은 토요일이었다. 두 아버지와 함께 걷고 싶다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쩔 수 없이 새벽 5시에 길을 나섰다. 하지만 아버지의 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얼굴색도 창백했다. 결국 아침 8시 이날 일정을 접기로 했다. 무엇보다 일정에서 중요한 것이 두 아버지의 건강 상태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이후 순례단의 일정은 ‘고무줄’이었다. 오전에는 15km, 오후에는 10km를 걷는다고 계산해 출발·도착지를 예정하지만 늘상 빗나갔다. 순례단이 내일 어디서 출발 또는 도착하는지 묻는 전화가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왔다. 나도 갑갑했다. 하지만 정답은 “오늘 두 아버지의 발길이 닿을 수 있는 최선의 곳”이었다.
전남에 들어가기 직전에 두 아버지는 하루 쉬겠다고 선언했다. 건강 상태가 이미 알람을 울리고 있었다. 실무적으로는 큰일이었다. 차량 지원과 아침·점심·저녁 식사, 낮 휴식 장소, 저녁 숙소 등을 전부 변경해야 했다. 7월20일 오전 일정을 마치고 다들 낮잠을 자는 시간에 나는 전화를 마구 돌렸다. 후원자들은 대부분 이해했다. 하지만 일부는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짜증을 냈다. 상황을 한참 설명하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도대체 난 어떻게 하라는 거냐.’
[작은 소망] ‘하늘에 있는 승현이에게, 다음엔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길, 손석희.’ 이 글을 승현군 아버지는 가슴에 달고 다닌다. 아버지와 승현군은 손석희 JTBC 사장을 좋아했다. 지난 4월27일 JTBC <뉴스9> 인터뷰를 마친 뒤 아버지는 “아들을 찾지 못했는데, 찾으면 그때 같이 사진을 찍고 싶다”고 청했다. 손 사장은 그러자고 했다. 승현군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자 손 사장은 약속을 지켰다. 90분간 함께 식사하며 승현군을 위한 글을 적어 건넸다. 순례길에 나설 때도 손 사장은 전화해 완주를 기원했다. 또 아버지가 선물로 보낸 넥타이를 매고 <뉴스9>에 등장했다. 고난의 길을 떠나는 아버지를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웅기가 하루라도 빨리 하늘에서 웃길
진도 팽목항이 가까워질수록 아버지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얼굴과 손, 팔은 새까맣게 타고 발에는 물집이 여러 개 잡혔다. 땀띠가 뒷목을 뒤덮었다. 무엇보다 황망한 마음으로 내려왔던 그날, 4월16일이 자꾸 떠올랐다. 그즈음 손석희 사장이 깜짝 방문했다. 세월호 참사 100일을 맞아 팽목항에서 <뉴스9> 생방송을 마친 이튿날인 7월25일이었다. 팥빙수를 안고서 손 사장이 찾아오자 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승현군 아버지와 손 사장의 남다른 인연을 웅기군 아버지도 부러워했다. “우리 아들도 유재석씨 팬이었는데….” 토요일에 아버지가 TV로 스포츠 경기를 시청하면, 아들은 곁에서 휴대전화로 <무한도전>을 보며 킥킥댔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핀잔을 주던 아버지는 이제 후회스럽다. “좋아하던 <무한도전>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웃도록 내버려둘 것을.” 그는 유재석씨가 웅기군을 위한 글을 써주면 영정 사진 옆에 놓고 싶다고 했다.
<한겨레21> 페이스북 계정으로 웅기군 아버지의 작은 소망을 알리자 <무한도전>이 화답했다. 유재석·박명수·노홍철씨 등이 7월18일 <무한도전> 기념 앨범에 ‘형들이 잊지 않을게’라는 메시지를 적고 서명한 뒤 <한겨레21> 쪽에 전달해왔다. <한겨레21>이 기념 앨범을 전하자 웅기군 아버지는 기뻐했다. 때마침 순례단을 방문한 단원고 선생님에게 건네며 “안산 (정부합동)분향소의 웅기 영정 앞에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웅기군이 하루라도 빨리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웃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화성·평택·아산·천안·공주·논산·익산·김제·부안·고창·영광·함평·목포·영암·해남·진도=글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서지원 인턴기자 iddgee@gmail.com·김연희 인턴기자 kyhbb72@naver.com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유가족 도보순례단이 지난 7월27일 진도대교를 넘어 전남 진도군 군내면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페이스북 친구들은 적극적이었다. 이상길(66)씨가 첫날 동행자로 나섰다가 저녁밥을 샀다. 둘쨋날(7월9일) 점심은 경기도 수원 이후교회의 김형권 전도사가 초대했다. 두 아버지와 함께 밥 먹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연락이 쏟아졌다. 아침 식사를 거른 채 새벽 5시부터 걸었다고 페이스북에 쓰자 아침밥을 싸오는 엄마들이 등장했다. 두 아버지가 “팥빙수가 먹고 싶다”고 적으면 아이스크림을 들고 누군가 찾아왔다. 이렇게 맺어지는 ‘길 위의 인연’에 두 아버지는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웅기군 아버지가 말했다. “출발할 때 사람들이 같이 오겠다는 걸 모두 말렸다. 중간중간에도 오지 말라고 뿌리쳤다. 그렇게 철저히 혼자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충남을 지나면서 내가 말릴 권한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걷는 사람들은 각자의 몫을 찾아냈다. 신부들이 교통을 통제하고 수녀들이 깃발을 들었다. 노동조합원들이 순례단의 짐을 차량에 싣고 앞장서서 호위했다. 아이쿱생협에선 간식을 준비했다. 중고생들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7월24일 경기도 수원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전남 함평으로 내려와 닷새간 순례길에 동행한 강봉춘(37)씨는 “망설이며 내려왔는데 길 위에서 치유가 됐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두 아버지의 십자가를 대신 들어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걷다보니 참여자들이 각자 십자가를 찾아서 나눠지고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뭉클했다.” “한마음으로 걸으니 답답함이 덜어졌다” 서울·부산·대전·광주 등 전국에서 시민들이 모여들어 7월27일 진도체육관에 들어설 때는 150여 명에 이르렀다. 학원 강사인 신영지(44)씨는 7월26일 전남 영암~해남 27km를 중학교 3학년생 아들 김서준(15)군과 함께 걸었다. 전날 부산에서 밤 11시에 출발해 밤새 운전하고 새벽 4시30분 출발지에 도착했다. 새벽 5시부터 10시간 동안 걸은 신씨는 “가슴에 슬픔이 가득한데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무기력했다. 아버지들과 한마음으로 걸으니까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고 했다. 부서진 십자가 7월15일 충남 논산에서 십자가가 부서졌다. 하루 10시간씩 아버지에게 매달려 흔들리다보니 십자가의 잇는 부분이 빠져버렸다. 웅기군 아버지는 십자가를 들고 목공소를 찾아내라고 다그쳤다. 그날 아침 충남 공주시 계룡면을 지날 때였다. 나무 의자를 예쁘게 만들어 야외에 전시해놓은 목조주택 건축회사(참솔건축)가 눈에 띄었다. 새로 이사간 집에 나무 의자를 사놓으려던 참이라 나는 연락처를 메모해뒀다.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 건축회사가 떠올랐다. ‘십자가도 고쳐줄 수 있을까.’ 나는 전화하며 걱정했다. 전후 사정을 들은 이유상 대표는 십자가를 가져오라고 했다. 십자가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접착제로 붙이면 다시 떨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방법은 십자가 뒤쪽에 나무판을 격자로 덧대는 것이었다. 그러면 무게가 1kg 늘어 6kg이 된다. 웅기군 아버지는 그러자고 했다. 무거워지더라도 십자가가 튼튼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 진도 팽목항을 거쳐 대전 월드컵경기장까지 800km(2천 리)를 짊어져야 하고, 둘째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선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혼과 고통, 시민의 바람이 담긴 십자가를 교황이 받는다면 세월호 진상 규명에 거대한 불씨가 댕겨질 것이라고 두 아버지는 믿었다.
20일 동안 안산에서 팽목항을 향해 걸어 온 유가족 도보순례단이 27일 오전 전남 진도 들판을 걸어서 실종자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진도실내체육관으로 향하고 있다. 단원고 학생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호진씨, 누나 이아름과 고 김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씨가 참여한 유가족 도보순례단은 안산 단원고에서 시작해 진도 팽목항까지 440km를 걸었다. 유가족 순례단은 29일 하루를 쉰 뒤 14일까지 한국을 방문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기 위해 대전월드컵경까지 330km를 걸어 갈 예정이다. 진도/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가 지난 7월27일 전남 진도군 군내면 연산문화생활관 마당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다(왼쪽). 유가족 도보순례단이 7월28일 장대비를 맞으며 전남 진도 임회면 도로를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