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나 사무실에서 그를 맞는 고객들은 그가 SK브로드밴드 직원인 것으로 안다. 그가 조끼 안에 입고 있는 티셔츠엔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의 회사명이 적혀 있다. “옷은 여름과 겨울에 한 번씩 받아요. 그냥 주는 것은 아니고 달라고 해야 주죠. 옷은 원청업체인 SK브로드밴드에서 절반, 하청업체에서 절반을 부담해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산재·고용보험 등 4대 보험은 남의 얘기
지난 7월16일 수요일 김씨를 만났을 때도 그는 빨간색 SK브로드밴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날 일감은 인터넷 이전 설치 1건이 있다고 했다. 다세대주택에서 옆집으로 케이블을 옮기는 일이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전봇대에 올라가 케이블을 집 쪽으로 끌어왔다. 더운 날씨라서 김씨는 헉헉댔다. 인터넷 TV 셋톱박스까지 교체하는 40분 정도의 작업을 끝내자 그의 하루 일은 끝나버렸다.
“7∼8월이 휴가철이고 해서 원래 비수기인데 요즘은 일감이 더 없어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본사 정책이 영업 확장보다 해약 방어라고 해요.” 그는 월요일에 1건, 화요일에 2건을 했다. 1건당 2만원이 안 되는 돈을 받는다.
본사에서 영업을 하지 않으면 영업점과 개통기사는 생계에 금방 타격이 온다. 김씨는 지난해 7월 260건을 처리했다. 한 달 평균 300여만원을 받았지만 많은 돈은 아니라고 했다. “계속 이동하며 쓰는 기름값, 자재비 등은 내가 냅니다. 퇴직금이나 상여금도 없어요.”
요즘은 일감이 줄어 지난 6월에 받은 돈은 180만원 정도였다. “본사가 소비자에게 인터넷을 바꾸라고 돈을 풀지 않으면, 요즘 세상에 누가 돈 안 받고 인터넷을 바꾸겠어요. 돈이 나오길 기다리겠죠.” 민주노총 희망연대노동조합의 SK브로드밴드지부는 이를 두고 원청업체를 의심하고 있다. 노조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와 단체협상을 하는 중에 경제적으로 힘들게 해서 노조 쪽 힘을 빼려 한다는 것이다.
통신기술서비스 노조가 만들어진 것은 지난 4월이었다. 노조 창립 총회에 700여 명이 모였다.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에서 일하는 통신기술서비스 노동자들이다. 개별 도급계약 형태로 복잡하게 이뤄졌지만, 실제로는 원청의 업무지시를 받고 있으니 노동자임을 인정해달라고 했다. 이들은 그동안 산재·고용보험 등 4대 보험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김씨 역시 4대 보험과는 멀었다. 그러다 지난해 초 은행에서 재직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해 업체에 사정해서 계약직 근로계약을 맺었다. 행복센터 업체에서는 대신 조건을 걸었다. 노동자인 김씨가 4대 보험료를 모두 부담하고 업체에서 내야 할 장애인고용분담금과 사업소세 등도 일부 분담하라는 거였다.
정부나 기업이 외면한 노동자들
“재직증명서가 필요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4대 보험료 말고 너무 많이 뗀다고 항의하니까 센터에선 ‘네가 원해서 하는 것이니 하려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4대 보험료를 직접 내며 근로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그가 정상적으로 노동자임을 보장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가 행복센터와 체결한 계약서를 보면, ‘근속기간이 1년을 초과한다 하더라도 퇴직금을 청구하지 않는다’ ‘근무 중 사고로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도 본인의 비용으로 치료를 받을 것이며, 산재보험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야 했다.
조세화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는 “퇴직금을 안 준다, 산재 처리 안 된다는 건 명백히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업체에서 버젓이 이것에 동의하라고 한 것 자체가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박재범 희망연대노조 정책국장은 “원청에서 하청업체의 정규직화를 유도하기도 했었다. 하청업체는 노동자를 정규직화하려다보니 4대 보험료나 퇴직금이 부담되니까, 이런 식의 변칙적 고용형태를 쓰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한 애프터서비스(AS) 기사가 전봇대에 올라갔다가 뇌경색으로 쓰러졌어요. 한 달 있다가 숨졌죠. 그 AS 기사는 정직원이었는데도 산재 처리가 안 됐어요. 고혈압 지병이 있어서 안 된다는 게 이유였죠. 이제는 노조가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요.” 김씨와 함께 일하는 행복센터 노동자들은 노조 설립 얘기를 듣자 모두 가입했다고 한다. 더 이상 정부나 기업에 보이지 않는 ‘유령 노동자’로 남기를 거부했다.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공시는 김씨 같은 노동자들을 포괄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한다. 고용형태공시는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이 대표발의한 고용정책기본법 개정을 통해 올해 처음 시행됐다. 입법 취지는 “비정규직 근로자가 급속히 증가해 사회 양극화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정부 대책으로는 비정규직 근로자 수를 줄이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고용형태를 공시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과도한 사용을 개선케 한다”였다.
보이지 않는데 개선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것은 통신기술서비스 노동자뿐만이 아니다. 삼성전자서비스는 고용형태공시에서 소속외근로자(간접고용)가 60명밖에 없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서비스노조는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와 단체협약을 맺으며 노동자임을 인정받았지만, 간접고용에 포함되지 못했다.
기아자동차 모닝과 레이를 생산하는 동희오토는 아예 공시 대상에서 빠졌다. 지난해 매출액 2037억원의 대기업이지만 정규직 노동자가 100여 명만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형태공시의 대상은 상시노동자 300명 이상 기업이다. 민주노총은 동희오토 서산공장에 16개 하청업체 125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있는 것으로 본다. 1250명도 ‘비정규직 노동자를 줄이려는’ 고용형태공시 밖의 ‘유령 노동자’다.
부정 공시에 대한 처벌 조항 없어
이 밖에도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현대파워텍은 고용형태공시를 통해 소속외근로자가 28명이라고 밝혔는데, 2010년 노동부 사내하도급 현황 조사를 보면 749명이었다. 그동안 이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했을 리는 없고, 현대파워텍이 허위 공시를 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부정 공시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는 걸 기업들이 악용할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기업이 외면할 유령 노동자가 앞으로 더 많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현대파워텍은 현대자동차에 자동변속기 등을 납품하는 업체다.
이종탁 희망연대노조 공동위원장은 “최근 SK브로드밴드나 LG유플러스의 하청업체들이 자신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서비스 기사들의 4대 보험을 해지하고 있다. 통계의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중간착취와 불법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주장했다. 이 위원장은 “삼성전자서비스 등 전혀 다른 형태의 노동자층에 대해 노조나 우리 사회가 진중하게 고민해야 할 과제가 나왔다”고 덧붙였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