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만들어야 해요”
생존 위안부 피해자는 54명뿐
등록 : 2014-07-11 16:08 수정 :
영화 <귀향>은 ‘태워지는 처녀들’이란 제목의 그림(사진)에서 출발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강일출 할머니가 2001년 미술심리치료 과정에서 그린 그림이다.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들이 산 채로 불구덩이에 밀어넣어져 불타는 모습과, 당시 가까스로 탈출한 강 할머니의 아픈 기억이 작은 도화지에 노랑·빨간색으로 재현됐다. <귀향> 연출자인 조정래 감독은 2002년 창작 소리꾼 ‘바닥소리’의 전속 고수(북 치는 사람)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공연을 하면서 할머니들과 인연을 맺은 뒤 이 그림과 만났다.
“충격이었죠. 그 그림을 보여주시는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 속에 아직도 새파랗게 질린 소녀가 숨어 있었죠.”
그림을 본 조 감독은 며칠이 지난 새벽녘에 눈물을 흘리며 <귀향>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고 한다. 이제 감독은 <귀향>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지 11년이 지난 올해 10월부터 촬영에 들어가 내년 3월께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위안부 소재가 다큐멘터리 형식이 아닌 극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은 처음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여러 투자자·영화 관계자들의 우려와 냉대도 뚫어야 했다.
“시나리오를 읽고 울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이걸 볼까?” “(대기업 소유) 극장들이 논란이 있을 만한 이 영화를 과연 제대로 상영할까?”란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영화를 멈추지 않게 만든 건 2만원, 5만원, 10만원씩 제작비를 후원하는 시민들의 정성이다. 후원 방법은 <귀향> 누리집(guihyang.com)에 들어가 ‘후원 안내코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700여 명의 시민들이 약 7천만원을 모아줬다. 여기엔 재일동포 사회에서 보낸 2300만원의 후원금도 들어 있다. 조 감독이 실제작비로 구상하는 25억원 규모와는 차이가 크지만, 일단 시민들의 손길을 촬영의 종잣돈으로 삼으려 한다. 출연배우 오디션에도 260여 명이 몰렸다.
“이분들의 정성 때문이라도 영화는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 영화가 결국 투자를 받지 못한다면 국민 후원금으로 영화를 만들었으면 해요. 10만 명의 이름이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 (후원자로) 올라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마치 굿을 할 때 굿판에 돈을 꽂는 굿전처럼, 시민들이 이 영화에 굿전을 대어 영화가 강제로 만들어지게 하는 거죠.”
영화 제작을 더는 늦출 수 없는 건 생의 끝자락에 다다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있기 때문이다. 생존 할머니는 54명이다. 조 감독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최대한 빨리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중앙대 영화학과를 졸업하고 영화 <두레소리>(2012) 등을 연출한 조 감독은 <귀향>을 전체관람가로 만들 생각이다.
<귀향>은 1943년 15살 전후에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들의 지옥 같은 과거를 비추고, 현재를 사는 16살 무녀가 타지에서 숨진 어린 넋들을 불러내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굿판의 형식을 가미한 영화다. 제목도 ‘귀신 귀’(鬼), ‘고향 향’(鄕)을 썼다. 당시 끌려간 소녀는 최소 20만 명이 넘고 살아 돌아온 소녀는 몇백 명에 불과하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어린 나이에 고통 속에 숨진 수많은 소녀들을 영혼으로나마 집에 돌려보내고 싶습니다. 영화 1회 상영마다 한 분의 영혼을 고향으로 모신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 겁니다.”
그래서 감독은 이 영화의 예비 포스터에도 ‘타향에서 죽어간 소녀들이 집으로 돌아온다’ ‘언니야 집에 가자’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