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유학생 샴스 사밈(오른쪽)과 마하크 파란기스가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머무는 전남 진도실내 체육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샴스 사밈 제공
참사는 참사의 악몽을 불러냈다. 1995년 일곱 살이던 파란기스는 “늘 따뜻하게 돌봐줬던 삼촌”을 잃었다. 카불로 진격해온 탈레반이 정부 공무원이던 삼촌을 납치했다. 가족은 ‘생’과 ‘사’ 중 그가 어느 쪽에 속했는지 알지 못한 채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전쟁은 사밈의 삼촌도 앗아갔다. ‘점령군 소련’에 대항했던 무자헤딘이 정부군 소속 군인이던 삼촌을 죽였다. 그의 친한 친구는 지난해 대법원 정문 앞에서 발생한 자살폭탄 테러 때 사망했다. 조국의 아픈 참화는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는 그들을 진도로 떠밀었다. 파란기스는 말했다. “몸이 굳을 만큼 심한 스트레스로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자원봉사라도 하면 좀 편해질 것 같았어요.” 두 사람은 일이 맡겨지길 기다리지 않았다. 4월20일 진도에 도착한 그들은 자발적으로 일을 찾아 움직였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자원봉사하는 그들은 눈에 띄었다. 밤이면 체육관을 울리는 엄마들의 울음소리에 그들도 잠을 자지 못했다.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거야.” 한 엄마가 팽목항에 써붙인 글이 파란기스를 충격했다. 항구를 감싼 부모들의 울음을 듣고, 엄마가 남긴 기다림의 글을 읽으며, 파란기스도 울음을 참지 못했다. “갑자기 심한 우울증이 찾아와 몸이 많이 아팠다”고 그는 떠올렸다. “죽은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살아 있을 거란 믿음을 버릴 수 없어요. 우리 가족도 돌아오지 않는 삼촌을 20년이나 기다렸어요.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세월호 실종자 어머니는 앞으로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까요.” 진도에서 버스를 타고 경기도 안산 정부합동분향소 앞까지 갔을 때도 파란기스는 끝내 분향소 안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그는 진도체육관에 마련된 심리치유센터를 찾아가 의사와 상담했다. 자원봉사 대신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파란기스는 거주지인 충남 아산으로 돌아와 한 달 정도 치료를 받았다. 5월20일 두 사람은 다시 진도로 내려갔다. 우울증 왔지만, 치료 뒤 다시 진도행 사밈은 “고국의 혼란을 지켜보며 정치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했다. ‘위험한 나라’ 아프간을 떠나 6년을 살아온 한국을 그들은 ‘가장 안전한 나라’라고 믿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책임지지 않는 정치’를 그들은 아프간에서도 자주 겪었다. 5월 초 바다크샨 오지마을에서 폭우와 산사태로 2500여 명이 매몰됐다. 마을 주민 3분의 1이 실종되거나 사망했다. 아프간 정부는 사고 다음날 구조를 중단하며 ‘집단무덤’을 선언했다. 바다크샨은 파란기스의 고향이다. 그의 친척들도 산사태로 사망했다. 사밈은 한국 사회가 보수적이라고 했다. 종교적 보수성이 강한 땅에서 살아온 그의 눈에도 한국은 보수성이 강한 나라로 비쳤다.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일방적으로 지도받고 통제받는 문화가 셉니다. 그래서 세월호 희생자가 많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자기 생각을 자신 있게 밝히면서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고 73일째(6월27일 기준)를 넘어섰다. 11명의 실종자 가족들이 아직 끝나지 않은 기다림 속에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한겨레21>은 각자의 위치에서 ‘세월호와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주 싣습니다. ‘세월호를기억하는시민네트워크’가 진도 현장에서 채록한 아프가니스탄인 자원봉사자들의 구술에 <한겨레21>이 추가 인터뷰를 보태 첫 이야기를 띄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