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거꾸로 선 재판. 노회찬 의원이 2013년 2월 대법원에서 의원직 상실 선고를 받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삼성이 검사들을 영입하는 이유 그런데 불법 증거라 사용할 수 없다는 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이 아니더라도 검찰은 세풍사건 수사 등을 통해 이미 삼성그룹 관련 자금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의지만 있었다면 진실을 밝히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이학수와 홍석현의 대화 뒤에 금품 전달 행위가 있었다거나 전달된 돈이 삼성그룹 비자금이었다면 공소시효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사법연수원에서 배우는 ‘검찰실무’ 시간에 검사인 교수는 ‘검찰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거악(巨惡) 척결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삼성 X파일 사건과 관련해 검찰은 거악을 척결하는 것이 아니라 거악에 눈을 감았다. 결국 수사 결과는 X파일 사건을 보도한 기자와 검사들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 국회의원을 기소하고,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대통령 선거와 검찰 조직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논의로 민주적 헌정 질서의 근간을 해치는’ 범죄를 모의한 자들(이상호 기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 중 소수 의견 일부)은 무혐의 처분하는 비상식적인 결론으로 끝났다. 참여연대는 X파일 수사가 한창이던 2005년 8월1일 이미 ‘삼성이 검사들을 영입하는 이유’라는 자료를 통해 X파일 사건 검찰 수사팀 및 지휘 라인과 삼성그룹 법무팀에 있는 검찰 출신 변호사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분석하면서 “삼성그룹의 법조인 영입은 기업 경영상의 필요보다는 일종의 로비스트로 고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도청 수사팀 및 지휘 라인에 있는 10명의 검사와 검찰 출신 삼성 변호사의 경력 비교는 이런 우려가 근거 있음을 보여준다”고 밝힌 적이 있다. 검찰의 수사 결과는 참여연대의 우려가 현실화된 것이라는 의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나는 검찰의 수사 결과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법원은 다르리라는 순진한 믿음이 있었다. 그런 나의 믿음에 부응하듯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상호 기자에 대한 1심 판결에서 X파일의 내용이 민주적 기본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공익적 사항이어서 이를 보도하는 것이 부득이했다, 보도가 정당행위에 해당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항소부도 노회찬 의원에 대한 2심 판결에서 X파일의 녹취록이 일반인이라면 사실이라는 강한 추정을 할 수밖에 없다, 인터넷에 검사 명단을 공개한 부분은 녹취록이 삼성의 검사들에 대한 조직적 금품 전달 계획을 내용으로 하고 있어 수사 촉구 등 정당한 목적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 정당행위에 해당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1심 패소 뒤 법원에 대한 믿음마저 사라질 무렵 2심 법원에서의 무죄 선고는 사법정의는 법원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을 지켜주었다. 판사가 30여 분에 걸쳐 판결문을 낭독하는 동안 법정은 때로는 한숨으로 때로는 환호로 술렁였다. 마지막에 ‘피고인 노회찬은 무죄’라고 선고되는 순간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법정을 흔들었다. 법원 앞에 펼쳐진 ‘삼성 X파일 진실 규명을 위해 나선 국민 모두의 승리입니다’라는 플래카드 문구가 현실로 나타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러나 잊지 못할 순간은 다른 의미의 잊지 못할 순간으로 대체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법원은 ‘피고인 노회찬은 유죄’라고 선고했다. 대법원은 X파일의 대화 내용에 언급된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하며 수사를 촉구한 행위에 대해 X파일 속 대화 시점은 8년 전의 일이므로 대화 속의 검사 실명 공개 행위는 비상한 공적 관심사라 볼 수 없고, 명단을 공개해 발생하는 이익이 통신비밀을 유지해 발생하는 이익보다 크다고 볼 수 없으므로 정당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유죄로 판단했다. 이 판결로 노회찬 의원은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X파일 사건은 노회찬 의원의 말대로 “‘도둑이야’라고 소리치니까 도둑인지 아닌지는 조사하지 않고 ‘왜 한밤중에 주택에서 소리를 지르느냐’며 소리치는 사람을 처벌하는 꼴”이라는 사법 현실을 뼈아프게 확인하며 끝났다. “국민의 심판이 아직 남았다” 삼성 X파일 사건은, 안진걸 경제민주화국민운동본부 사무처장의 “상식과 정의가 완전히 거꾸로 선 사례로 남을 것이다”라는 말처럼 권악징선(勸惡懲善)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법조인으로서 큰 절망감과 부끄러움을 안겨준 사건으로 남았다. 하지만 노회찬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하던 날 “오늘의 대법원 판결은 최종심이 아니다. 국민의 심판, 역사의 판결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한 것처럼, 비록 사법 현실에서는 정의가 실현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다른 방식으로 정의가 실현되리라 믿는다. 그것이 내가 ‘X파일 사건’을 굳이 ‘삼성 X파일 사건’이라고 명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갑주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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