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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홍가혜와 김문수의 ‘우결’

깔때기적 자기애의 두 유형, 세월호 참사에 나타난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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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22 18:14 수정 : 2014-04-24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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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백 명의 생명과 함께 침몰한 세월호. 믿겨지지 않는 참사에 하루 종일 TV통을 붙들고서, 넋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피해자와 실종자들은 내가 만나본 적도 없는 학생들이고, 그 실종자 가족들은 내가 이름도 모르는 분들이지만, 마치 내 잘못인 것 같아서 한 이틀은 혼이 빠져 있었던 것 같다(대형참사는 으레 공동체 전체의 잘못이 아니었던가). 아마도 잠시나마 일손을 놓고,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숙이고 지내는 것이, 내가 조금이라도 사죄하는 길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러고 있는 것 같았고. 패닉을 통해서라도 희생자들과 교감하고 그들에게 사죄하는 것, 이것이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교감방식이고 또 존재방식이리라.

 

중생을 더 큰 패닉에 빠뜨린 허언증자, 정치인 

 

김문수 경기도지사.
  그런데 안 그런 사람들도 있는가 보다. 그리고 그들은, 패닉이 미덕인 줄 알고 있던 나 같은 중생들을 더 큰 패닉에 빠뜨렸다. 그들은 넋을 빼앗고 혼을 빼놓는 이 비극 속에서도 자아를 찾고 자기를 어필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고, 또 그러기 위해서 일부러 현장을 찾으신 용자(勇者)들이시다.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허언증자들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장난 삼아 SNS에 유언비어를 끼적인 철딱서니들이나, 골방폐인으로 썩느니 홍어드립이나 싸지르는 키보드 워리어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그들에겐, 어떤 패닉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말끝마다, 말머리마다 ‘자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가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또 어떤 화제를 꺼내더라도, 리액션 속에 은근히 자기 자랑을 끼워넣거나, 대화의 문맥들을 일부러 자기 얘기로 유도해 나감으로써, 대화 분위기를 참 서먹서먹하게 만든다. 주변 사람들도 참 피곤하고. 무엇보다도 이런 사람들이 얄미운 이유는, 그것이 주변 정황과 관심사를 이해하지 않고서, 모든 말들을 자기에 대한 궁금증으로, 모든 시선들을 자기에 대한 관심으로 강제번역하기 때문이다. 깔때기형 자기애엔, 자기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관객이라는, 기껏해야 자신을 주인공으로 돋보이게 하는 조연일 뿐이라는 괴이한 전제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이제 나를 보라. 너희는 내 말을 들어보라. 나는 주인공이고, 너희는 관객이니까. 깔때기 자기애는, 주변 정황을 모두 자신을 향한 무대로 만들어버리는, 눈치코치 없는 권력욕에 의해 작동한다.

MBN에 허위 사실을 인터뷰한 홍가혜 / 출처 인터넷 캡쳐
  깔때기 자기애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로 빈 깡통이 요란한 경우다. 가진 권력이 너무 작아서 있는 것처럼, 그것도 많은 것처럼 과대포장하는 경우다. 허언증자의 경우이고, 세월호 참사에선 홍가혜의 경우라 하겠다. 그녀는 휴양지에서 스노클링하던 실력으로 이 모든 난세를 일거에 구원할 수 있을 거라 스스로 믿었던, 전형적인 깔때기 나르시시스트다. 두 번째는 반대로 찬 깡통이 요란한 경우다. 가진 권력이 너무 많아서, 시시각각 과시하지 않으면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인데, 잘 나가는 정치인의 경우이고 세월호 참사에선 -너무 많아 골라내기 어렵지만, 그래도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김문수의 경우라 하겠다. 김문수는, 실종자 가족들의 호소에 “나는 경기도 도시사다. 경기도에서 영향력이 있다”라면서, 자기 얘기와 자기 자랑을 은근슬쩍 끼워넣을 줄 알 뿐만 아니라, “그러나 여기는 경기도가 아니다”면서 상대방을 기분 상하지 않게 깨우쳐줄 줄도 아는, 매우 정교하고 기민한 깔때기 나르시시스트다. 과연 홍가혜와 김문수, 둘 중에 누가 더 뾰족한 깔때기일까? 해답은 쉽지 않다. 극강 UDT 잠수부들을 페이스북 무용담의 조연으로 밀어내려는 무대 제작자와, 실종자 가족들까지도 경기도(혹은 차차기 대선?)의 관객으로 밀어내려는 무대 제작자, 박빙이다.

 


평소엔 고문관의 애교로 봐줄 만하지만 

 

  물론 깔때기형 자기애는 평소엔 고문관의 애교로 봐줄 만하다. 자기 사랑이 나쁜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평시(平時)가 아니라 전시(戰時)가 되면, 이는 결코 환영받을 수 없다. 전시상황에서 공동체가 그 구성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잠시나마 ‘자기’를 버리고 희생자들과 나누는 교감과 공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애는 재난을 애도하려는 공감을 방해하는, 또 다른 재난이 된다. “왜 다들 패닉에 빠져 있지? 여기 내가 있는데?” 하지만 나는 할 말을 잃고 싶고, 슬퍼하고 싶고, 애도하고 싶고, 공감하고 싶다. 지금 당신들의 연극이 그것을 막고 있다. 바로 당신의 무대, 당신의 자기애, 당신의 깔때기가 재난이다. 그리고 충고하건대, 지금 진도는 허언증녀와 영향력맨이 ‘우결’을 찍을 만한 곳도 아니다.

  김곡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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