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2월12일 사건 현장에서 배와 엉덩이에 큰 부상을 입은 응웬티탄의 오빠 응웬득상이 20살에 찍은 사진, 목숨을 잃은 엄마 판티찌, 이모 판티응우, 언니 응웬티쫑, 남동생 응웬득쯔엉(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응웬티탄 제공
나중에야 알았다. 한국군은 6살인 남동생 응웬득쯔엉의 입에 대고 총을 쏘았다. 동생은 입이 다 날아간 채 죽었다고 했다. 언니 응웬티쫑과 동네 오빠 찐쩌는 동굴 앞에서 총에 맞아 즉사했다. 이모 판티응우는 나중에 집을 불태우려는 군인들을 말리다 칼에 찔려 죽었다. 이모의 아들 도안테민은 엄마 옆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응웬티탄은 오빠 응웬득상과 함께 헬리콥터로 후송됐다. 집에 있던 7명 가운데 5명이 죽었다. 그렇다면 그토록 찾았던 엄마는 어디에 있는가. 6살 남동생 입에 총구를 대고… 응웬티탄은 인근 다낭의 병원 침상에서 눈을 떴다. 의식을 차리자 곁엔 외할머니 응웬티소아(67)뿐이었다. “엄마는 어디 있죠?” “아, 엄마는 집에 일이 많단다. 걱정하지 마라.” “동생은요? 오빠는요? 언니는요?” 속사포 같은 질문에 외할머니는 제대로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엄마는 곧 온다”고만 했다. 순진한 8살 소녀는 진짜로 믿었다. 엄마는 괜찮지 않았다. 마을 구덩이의 그 주검 무더기 속에 엄마도 있었다. 정월 대보름 전날이 아니었다면, 다낭에서 일하느라 밤늦게 돌아왔을 텐데. 그렇다면 병원에서 딸을 지켜줬을 텐데. 소녀 응웬티탄은 엄마도 잃고, 언니도 잃고, 동생도 잃었다. 이제 유일한 혈육은 엉덩이가 날아간 오빠뿐이었다. 엄마. 소년은 뛰었다. 무작정 뛰었다. 엄마는 확실히 없었다. 아기를 낳으러 디엔반현에 있는 병원에 갔다. 아빠도 엄마를 따라갔다. 소년은 책임감이 강했다. 오른쪽 다리에 총을 맞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부위를 천으로 묶었다. 입에서는 “엄마” 소리가 터져나왔지만, 동생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들판을 가로질러 달렸다. 쩐지옙(15)은 퐁넛 입구의 집에 있는 동굴에 숨어 있다가 나온 뒤였다. 마을 근처 구덩이에 쓰러진 10여 구의 주검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둘째 동생을 찾아야 했다. 안 보였다. 퐁니 쪽으로 달려갔다. 개울 근처에도 여러 구의 주검이 누워 있었다. 주검마다 바나나잎들로 덮였다. 쩐지옙은 바나나잎을 하나씩 뒤집으며 얼굴을 확인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마침내 찾았다. 5살배기 동생 쩐뜨가 처참한 모양을 하고 엎어져 있었다. 얼굴은 볏짚과 흙 범벅이었다. 가슴과 발에 총자국과 칼자국투성이였다. 뭔가 불타는 냄새를 맡지 않았더라면, 쩐지옙은 동굴 속에서 나오지 않았으리라. 첫 총성이 나자 할아버지 쩐호안(70), 할머니 응웬티우엉(77)과 함께 숨었지만, 연기 냄새를 맡는 순간 물소가 걱정됐다. 엄마·아빠가 애지중지하는 가족의 재산목록 1호였다. 벽돌로 지은 집과 달리 외양간은 초가집이었다. 물소가 타 죽으면 안 되었다. 가축을 지키겠다는 본능에 이끌려 집 밖으로 나왔다가 다리에 총을 맞았다. 50m 밖에서 한국 군인들이 떼지어 몰려왔다. 쩐지옙은 비틀거리면서도 물소를 묶은 줄을 풀었다. 할아버지는 뒤따라나오자마자 가슴에 총을 맞았다. 쩐지옙은 다시 집 동굴로 들어가 동생 쩐반린(9), 쩐티땀(3)과 함께 한참을 숨었다. 조용해서 나가보니 한국군이 물러간 자리에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이 몰려왔다. 그들이 든 총을 보자 다시 공포가 밀려왔다. 또 동굴로 숨었다. 조금 뒤 아버지 쩐탄(41)과 고모 쩐티옷(30)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살았다는 마음으로 나갔을 때 아빠가 물었다. “쩐뜨는?” 몇 시간 전부터 안 보이던 녀석이었다. 밖에서 놀다가 군인들과 맞닥뜨렸다면…. 불쑥 엄마의 질책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허겁지겁 달려나가 마침내 개울가에서 찾은 동생은, 바나나 잎사귀에 덮여 말이 없었다. 엄마는 물었다 “우리 식구 다 죽었나요?” 아빠는 디엔반현의 병원에서 마을이 불탄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모와 함께 달려온 터였다. 산후조리 중이던 엄마 응웬티수웬(39)은 빨리 집에 가보라며 아빠의 등을 떠밀었다. 고모가 동행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1번 국도에선 미군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접근을 막았다. 저 멀리 퐁니·퐁넛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민병대원 중 일부는 마을에 가족이 살았다. 그들은 빨리 들어가서 주민들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군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국군이 마을을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당장 뾰족한 수는 없었다. 되레 한국군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컸다. 총 몇 자루 들고 가봤자 화력에서 게임이 안 됐다. 아빠와 고모는 마침내 쩐지옙이 찾아낸 쩐뜨를 목도했다. 고모 쩐티옷이 쩐뜨를 들어올렸다. 총을 여러 발 맞은 쩐뜨의 몸은 너덜너덜했다. 아이들의 주검은 도처에 있었다. 돌이 채 안 된 아이도 있었다. 고모는 그날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람의 뼈와 내장을 처음 보았다. 이렇게 많은 주검을 보기도 난생처음이었다. 고모는 오전에 먹은 음식물을 몽땅 게워냈다. 그날로부터 일주일간 밥을 먹지 못했다. 엄마는 병원으로 돌아온 아빠에게 체념하듯 물었다. “우리 식구들 다 죽었나요?” 아빠는 “한 명만 죽었다”고 답했다. 엄마는 “다행”이라고 말했다. 아빠가 “안심해도 좋다”고 위로하자 역정을 냈다. “웃기지 마요. 거짓말하는 거 다 알아요. 살아 있다면 내 눈앞에 보여줘요.” 다리에 총을 맞은 쩐지옙과 가슴을 총을 맞은 할아버지는 엄마가 있는 디엔반현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나머지 멀쩡한 동생들도 왔다. 실물을 보고서야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믿었다. 한 명만 죽어 다행이라는 역설. 엄마. 두 명의 엄마는 결국 모두 하늘나라로 갔다. 응웬티탄의 엄마만이 아니었다. 그날 병원에서 막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던 쩐지옙의 엄마도 두 달 뒤 지뢰를 밟고 저 세상 사람이 됐다. 소년과 소녀는 살았다. 다리에 작은 총상을 입었던 소년 쩐지옙은 디엔반현의 작은 병원에서 일주일간 입원했다. 배에 치명적 총상을 입었던 소녀 응웬티탄은 다낭의 병원에서 1년간 입원했다. 오빠 응웬득상은 같은 병원에 있다가 다낭 앞 바다에 떠 있는 독일 배의 선상병원으로 옮겨졌고, 1975년 4월 호찌민에 있는 큰 병원에 가 수술을 받고 돌아왔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서도 그들은 상처를 딛고 꿋꿋하게 살아갔다. 성별조차 식별할 수 없었던 주검들 “5명의 미 해병과 26명의 (남베트남) 민병대원과 두옹 준위로 구성된 경비조가 마을로 들어갔고 부상용 수송헬기 지원을 요청했다. 2명의 여성과 1명의 소년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이들은 헬기로 수송됐다. 경비조는 불탄 주택 잔해에 깔려 있는 2명의 노인과 풀로 덮인 채 도랑 근처에 있는 많은 주검들을 발견했다. 몇몇 주검들은 잔해에서 끄집어냈다. 이들은 너무 심하게 불에 타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성별조차 식별할 수 없었다. 오솔길을 따라가보니 2명의 부상당한 여자와 또 다른 많은 주검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죽일까봐 두려워 신분증을 꺼내들었다. 경비대 일원인 본(Vaughn) 상병이 사진을 찍었다.” 그날, 현장에서 구조 작업을 했던 미 해병 실비아 중위가 사건 나흘 뒤인 2월16일 상급부대에 진술한 내용이다. 헬리콥터로 후송됐다는 2명의 여성 중 한 명이 응웬티탄이다. 또 다른 소년은 응웬티탄의 오빠인 응웬득상이다. 진술서 맨 끝엔 현장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본 상병이 등장한다. 그는 현장 구석구석을 돌며 카메라를 들이댔다. 사진엔 어떤 장면들이 담겼을까.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