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강제퇴거를 반대하는 간판이 즐비했던 우토로 마을 어귀에는 우토로의 의미가 담긴 글귀와 그림이 놓여 있다.
우토로를 없애는 것은 일본인의 양심을 없애는 것 9년 전, 우토로에 첫발을 디딘 <한겨레21> 취재진을 맞았던 ‘구호’는 여전히 마을 어귀에 숨 쉬고 있다(<한겨레21> 제560호 참조). 한-일 양국에서 버려진 채 스스로 일궈온 삶의 터전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렸던 재일조선인들이 손수 지었다는 구호다. 마을 앞에 즐비했던 ‘강제퇴거 반대’ 간판 자리에는, 시구가 적힌 벽화가 들어서 있다. 강제철거 위기에서 벗어난 뒤 찾아든 변화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뒤로하고, 우토로 마을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지난 1월 말, 일본 국토교통성·교토부·우지시가 참여하는 ‘우토로지구 주거환경 개선검토 협의회’는 우토로에 공영주택 60채 및 도로 건설, 상하수도 시설 정비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마치즈쿠리’(민관 협치 마을 만들기) 기본구상을 발표했다. 협의회 출범 7년 만이다. 기본구상에 맞는 계획을 세우고 설계 작업을 거쳐 본격적인 공사가 완료되기까지는 최소 5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수요일인 지난 2월12일, 마을은 고요했다. 1999년 320여 명이던 주민 수는, 한국 시민들의 관심이 이어지던 2005년 당시 200여 명으로 줄었고, 지금은 151명이다. 1940년대부터 우토로를 지켜온 1세대는 5명만이 생존해 있다. 2012년 말 ‘마치즈쿠리’를 위한 기초조사 결과를 보면, 주민 158명 가운데 65살 이상 고령자는 57명(36.1%)이었다. 우토로에 40년 이상 거주한 세대는 80%에 달했다. 3분의 2 세대 아직도 우물물 길어다 써 마을회관 벽 한켠에는 2007년 주민들이 모여 찍은 기념사진이 컬러로 인쇄돼 붙어 있었다. 쫓겨나지 않을 수 있다는 희소식에, 어르신들의 얼굴이 모처럼 환하게 핀 날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왔다꼬.” 매일 마을회관을 찾는다는 강경남(90) 할머니가 이날도 마을회관에 들렀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일본 오사카로 건너왔다는 할머니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을 피해 해방 직전 우토로에 들어와 한평생을 살았다. 곡절 많은 인생사가 경상도 사투리와 일본어가 뒤섞인 채 쏟아져나온다. “여 오니 어데 묵고살 게 있나. 남자들은 어데 일 찾으러 가고. 우덜은 조매난 아를 놔두고 고철 주워가 짊어지고 온다. 그 팔믄 돈 조맨씩 벌어. 촌에 나락도 비로 가고, 풀도 매러 가고. 나물 캐와 팔고 그래가 살았다.” 마을 주민회 하수부(67) 부회장은 1989년을 도무지 잊을 수 없다. 우토로에서 나고 자라, 다시 이곳에서 6명의 자녀와 16명의 손자를 봤다는 그에게 ‘우토로에서 나가라’는 퇴거명령서가 날아들었다. 주민들의 외롭고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사용 비행장 건설을 위해 일본 정부는 조선인 노동자를 반강제로 동원한다. 그들의 합숙소(함바)가 우토로 마을 역사의 시작이었다. 일본이 패전한 뒤, 우토로 땅에 들어온 미군은 주민들을 쫓아내려 했다. 주민들은 미군이 든 총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1960년대 마을 토지 소유권은 비행장 건설업체를 인수한 닛산차체로 넘어간다. 닛산차체는 주민들의 토지 점유를 묵인했지만 도로·상하수도 등 인간답게 살기 위한 시설 설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주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들여다보지 않았다. 주민들을 외면한 건,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1987년 닛산은 우토로 땅을 제3자에게 매각했고, 소유권은 서일본식산으로 넘어간다. 1989년 서일본식산은 주민들에게 퇴거를 요구하며 토지명도 소송을 제기했다. 2000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퇴거명령 확정판결을 내린다. 우토로의 시간은 25년 동안 멈춰서 있다. 강경남 할머니 집 앞에는, 함바집 두 채가 무너질 듯 서 있다. 1980년대까지도 사람이 살던 곳이다. 인근 일본인 마을과 달리, 우토로 마을길의 포장 상태는 매끄럽지 않다. 마을 지대는 배수로 깊이보다 낮아 침수 피해가 빈번하다. 우지시를 상대로 ‘투쟁’을 벌인 끝에, 상수도가 마을에 설치된 건 1987년의 일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세대는 상수도에서 물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관을 설치했지만, 나머지 3분의 2 세대는 지금도 우물물을 길어다 쓰고 있다. “앞으로 여기서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 계속돼왔기 때문에, 마을 모습은 1980년대 말 이후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주민들을 돌보고 있는 미나미야마시로동포생활센터 김수환 대표의 설명이다. 한국 사회에 우토로 주민들의 사연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다. 2004년 9월, 일본 시민단체인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 회원 및 주민들은 강원도 춘천에서 열린 한-중-일 거주문제 국제회의에 참여했다. ‘우토로를 지켜달라’는 애끓는 호소는 지구촌동포연대(KIN) 등 여러 단체를 움직였다. 이듬해 한국에선 ‘우토로국제대책회의’가 결성됐다. 잘못된 한-일 협정이 문제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당장 주민들의 거주권 확보가 시급했다. <한겨레21>은 우토로국제대책회의·아름다운재단 등과 함께 ‘그까이꺼 사버리자’며 우토로 토지 매입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섰다. 당시 서울에 사는 51살 주부 독자는, 10년 동안 푼푼이 모은 500만원을 남편 몰래 쾌척하기도 했다. 뜨거운 여론은, 정치권을 움직였다. 2007년 말, 국회에서 우토로 토지 매입을 위한 예산 30억원 지원을 의결했다. 한-일 시민사회와 재일동포 등이 우토로를 지키기 위해 모금한 돈은 17억원이었다. “교토부에 우익 쪽 항의 전화 많이 와” 우토로 토지 매입이 완전히 마무리된 건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뒤였다. 한국 정부의 지원금은 곧바로 주민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다른 재외동포와의 형평성을 이유로 예산 집행이 미뤄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엔화 가치가 치솟았고, 확보할 수 있는 부지는 줄었다. 2011년, 한국 정부 지원금을 관리하는 ‘우토로 재단법인’은 우토로 땅 3808.4㎡ (약 1152평)를 사들였다. 한 해 앞서, 주민회는 한-일 시민사회가 땅 매입을 위해 모금한 돈을 기반으로 ‘우토로 민간기금재단’을 설립하고 우토로 땅 2750.52㎡(약 832평) 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두 재단이 소유한 땅은 우토로 마을의 약 3분의 1 크기다. 토지 문제가 매듭지어진 뒤에야, 일본 정부는 ‘마치즈쿠리’ 사업의 닻을 올렸다.
지난 2월13일 우토로 마을회관에서는 주민회 김교일 회장을 비롯해 지구촌동포연대,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관계자들이 모여 ‘우토로 민간기금재단’ 평의원 회의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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