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1주년 맞은 연예인 홍석천… 인권단체 참여하며 본격 방송활동 채비
“잘 지내?” 어쩌다 그와 마주칠 때면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인사말이었다. “잘 못 지낸다 왜?” 코끝까지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던 지난 겨울, 그의 대꾸는 그랬다. “뭐 그럭저럭.”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자, 그의 목소리에도 조금 온기가 돌았다. 만나면 걱정스레 안부부터 물어야 하는 사람. 커밍아웃한 연예인 홍석천의 한해는 그렇게 흘러갔다. 쓸쓸한 커밍아웃 인터뷰(<한겨레21> 327호 참조)를 한 지 382일 만에 커밍아웃 1주년 인터뷰를 가졌다. 이번엔 유쾌한 수다가 이어졌다.
실업자 신세 벗어나 분주한 나날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처음엔 끔찍했다. 커밍아웃하자마자 방송에서 ‘아웃’당했으니까. (웃음) 몇달 동안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 때까지 종일 멍하게 앉아 담배만 피웠다. 답답하니까 술 마시게 되고. 밤에도 잠이 안 와서 멍하니 케이블TV 켜놓고 뉴스 보곤 했다. 말 그대로 실업자 신세였다. 뭐가 제일 힘들었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누가 ‘너 용서할 테니 같이 하자’고 하기 전에, 먼저 나서서 ‘뭐 하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 오죽하면 자청해서 아는 형이 하는 음식점에 가서 서빙하고 그랬겠는가? 다닐 때도 일부러 지하철 타고 다니곤 했다. 사람 만나려고. 도망치고 싶을 때는 없었나. =학비 대줄 테니 외국 나가서 공부하라는 후원자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다 사양했다. 여기서 도망치면 영원히 패배자가 되는 것 아닌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세상이 매몰차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식인 100명과 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들은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을 만들어 그를 도왔다. 지지에 보답하듯 그의 지난 한해는 인권활동으로 메워졌다. 인권영화제와 민가협 콘서트에서 사회를 봤고, 게이 퍼레이드에 앞장섰으며, 동성애자 차별 반대 공동행동의 집회에 나서기도 했다. 그 사이 전국을 누비며 숱한 대학강연을 다녔다. 인권활동이 망설여지지는 않았나. =주변에서는 다들 ‘방송복귀 빨리 하려면 입 다물고 있으라’며 말렸다. ‘예’ 하고 돌아섰지만, 그럴 거면 커밍아웃할 이유가 없었다. 커밍아웃을 하고 나니 뒤에서 나를 지켜볼 동성애자들도 생각하게 되고, 알게 모르게 책임감이 느껴졌다. 전 매니저와 헤어진 것도 인권단체 활동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라던데. =스포츠신문을 통해 커밍아웃당했을 때, 매니저는 동성애자란 사실을 덮어두고 가자고 했다. 그뒤 인권활동에 나서는 것에도 반대했다. 결국 나는 나 자신을 인정하기로 했으니 같이 일할 수 없었다. 인권활동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연예계에만 묻혀 있었으면 못 만났을 사람들을 만났다. 딱 한 걸음만 옮기니까 아픈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얼마 전 대학 동성애자 캠프를 갔을 때, 한 학생이 ‘나는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함께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커밍아웃을 했다. 그때 참 세상에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아픔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참 많다고 느꼈다. “누구도 커밍아웃 강요할 권리 없다”
인터뷰가 시작되고 30분쯤 지났을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한참 열변을 토하던 그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살가워졌다. “이따 형이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는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애인인가.
=(웃으며)아니다. 커밍아웃 지지 사이트를 만들어준 고등학생 팬이다. 이 친구도 동성애자인데 어린 나이에 벌써 자살을 3번이나 시도했다고 한다. 내가 커밍아웃한 뒤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져줘서 고맙다”며 이메일을 보내와 알게 됐다. 변태로 몰아붙이는 세상에서, 동성애자들이 사춘기를 무사히 통과하기란 쉽지 않다. 어린 동성애자들의 본보기가 됐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무겁다.
커밍아웃이 가져온 또다른 변화는.
=진짜 친한 사람과 안면으로 대하는 사람을 구분하게 됐다.
가족들은 충격에서 벗어났는가.
=많이 좋아졌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농약 먹고 같이 죽자’고 했는데…. 요즘엔 ‘왜 방송 못하니?’라며 걱정하신다. 친척들도 반갑게 맞아주시고. 아직 완전히 이해하시는 건 아니지만, 점점 좋아지고 있다.
즐거운 일이라면.
=내 영혼을 속이지 않아도 되니까,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하니까 좋다. 남의 눈치 볼 필요없이, 주말이면 게이바에 가서 신나게 춤출 수도 있고. (웃음)
1년 전이 떠올랐다. 서울 약수동 아파트에서 커밍아웃 인터뷰를 하던 날, 그는 게이바가 밀집해 있는 이태원 거리의 불빛을 내려다 보며 “친구들을 지척에 두고 가지 못하다니…”라며 탄식을 내뱉었다. 커밍아웃 덕에 그는 이제 동성애자 공동체의 ‘환영받는’ 동료가 됐다.
동성애자 친구들은 많이 늘었나.
=(웃으며)부지기수다. 어딜 가도 따뜻하게 맞아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한편에선 당신이 커밍아웃을 해서 동성애자들이 불편해졌다는 얘기도 있다. 혹시라도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질까봐.
=스스로 오픈이 안 돼 있기 때문인데…. 커밍아웃은 모든 동성애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굳이 밝히고 싶지 않으면 숨어살아도 좋다. 아무도 커밍아웃하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두려움만 벗어나면 행복이 온다는 사실도 알았으면 한다.
커밍아웃은 그에게 행복한 일상을 안겨준 대신 일하는 기쁨을 앗아갔다. “하루라도 일을 못하면 불안해진다”고 고백할 만큼 일중독인 홍씨. 그에게 내려진 방송 퇴출의 족쇄는 지난 5월, 문화방송의 아침 프로그램, <모닝스페셜>에 출연하는 것으로 풀렸다. 커밍아웃한 지 8개월 만이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의 심정은.
=좋은 건 둘째치고 두려움이 앞섰다. 시청자들 반응이 어떨지 모르니까.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행히 주변에서 도와줘서 견딜 수 있었다. 사실 방송복귀에는 2년 정도 걸릴 거라고 예상했었다. 사회가 빠르게 변한다는 걸 피부로 느낀다.
아직도 예전만큼 방송에서 자주 볼 수는 없다. 걸림돌이 뭐라고 생각하나.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은 ‘왜 방송에 안 나오느냐’고 묻는다. 그런데도 방송출연은 어렵다. 아무래도 방송사쪽에서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 이 문제도 서서히 풀려가고 있다. 곧 TV 오락프로그램에 고정출연하게 될 것 같다.
방송 고정출연… 에이즈 예방 활동 관심
“1년 만의 실질적인 복귀”라며 그는 조금 들떠 있었다. 1년 사이 방송가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그가 브라운관에서 밀려난 사이, 트랜스젠더 하리수씨는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묘한 엇갈림이다. 하리수씨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하리수씨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나.
=전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친구가 살아온 과정이 나만큼이나 힘들었을 것이란 걸 아니까. 느껴지니까. 오히려 힘든 일을 다 이기고 열심히 하는 게 자랑스럽다.
좀 엉뚱한 얘기지만, 당신을 쁘아송과 동일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TV에서 보여지는 내 모습은 어디까지나 연기다. 윤다훈 선배가 바람둥이 역할을 한다고 바람둥이는 아니지 않은가. 설사 내가 극단적으로 희화된 게이 캐릭터인 쁘아송 같은 역할을 다시 한다 해도 그건 연기일 뿐이다. 내가 그럴 것이다, 게이들은 다 그렇다는 추측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내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어디에나 동성애자들은 있다. 단지 모르고 있을 뿐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혹시 동성애자란 사실이 알려지더라도 제발 내쫓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들에게도 삶의 목적지까지 갈 권리가 있다.
동성애자들에게는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자신을 아꼈으면 좋겠다”고, 이성애자들에게는 “동성애자를 제발 에이즈환자로 보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다면, 에이즈 예방 활동에 발벗고 나서고 싶다고도 했다. 카페 문을 나서며, 이번엔 그가 먼저 “잘 지내”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환하게 웃으며.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커밍아웃 1년 만에 웃음을 되찾은 홍석천. 이제 그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던 방송 퇴출이라는 족쇄도 풀렸다.(박승화 기자)
=처음엔 끔찍했다. 커밍아웃하자마자 방송에서 ‘아웃’당했으니까. (웃음) 몇달 동안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 때까지 종일 멍하게 앉아 담배만 피웠다. 답답하니까 술 마시게 되고. 밤에도 잠이 안 와서 멍하니 케이블TV 켜놓고 뉴스 보곤 했다. 말 그대로 실업자 신세였다. 뭐가 제일 힘들었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누가 ‘너 용서할 테니 같이 하자’고 하기 전에, 먼저 나서서 ‘뭐 하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 오죽하면 자청해서 아는 형이 하는 음식점에 가서 서빙하고 그랬겠는가? 다닐 때도 일부러 지하철 타고 다니곤 했다. 사람 만나려고. 도망치고 싶을 때는 없었나. =학비 대줄 테니 외국 나가서 공부하라는 후원자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다 사양했다. 여기서 도망치면 영원히 패배자가 되는 것 아닌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세상이 매몰차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식인 100명과 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들은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을 만들어 그를 도왔다. 지지에 보답하듯 그의 지난 한해는 인권활동으로 메워졌다. 인권영화제와 민가협 콘서트에서 사회를 봤고, 게이 퍼레이드에 앞장섰으며, 동성애자 차별 반대 공동행동의 집회에 나서기도 했다. 그 사이 전국을 누비며 숱한 대학강연을 다녔다. 인권활동이 망설여지지는 않았나. =주변에서는 다들 ‘방송복귀 빨리 하려면 입 다물고 있으라’며 말렸다. ‘예’ 하고 돌아섰지만, 그럴 거면 커밍아웃할 이유가 없었다. 커밍아웃을 하고 나니 뒤에서 나를 지켜볼 동성애자들도 생각하게 되고, 알게 모르게 책임감이 느껴졌다. 전 매니저와 헤어진 것도 인권단체 활동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라던데. =스포츠신문을 통해 커밍아웃당했을 때, 매니저는 동성애자란 사실을 덮어두고 가자고 했다. 그뒤 인권활동에 나서는 것에도 반대했다. 결국 나는 나 자신을 인정하기로 했으니 같이 일할 수 없었다. 인권활동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연예계에만 묻혀 있었으면 못 만났을 사람들을 만났다. 딱 한 걸음만 옮기니까 아픈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얼마 전 대학 동성애자 캠프를 갔을 때, 한 학생이 ‘나는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함께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커밍아웃을 했다. 그때 참 세상에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아픔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참 많다고 느꼈다. “누구도 커밍아웃 강요할 권리 없다”

사진/ 홍석천은 지난 1년 동안 인권활동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게이 퍼레이드에 참여한 모습.(박승화 기자)

사진/ 1년 전 이맘때 홍석천은 커밍아웃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당시 <한겨레21>과 인터뷰하는 모습.(강재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