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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낡은 세계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려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창작 기량을 향상시킨답시고 문장론이라든가 수사학이라든가 문예이론 서적 따위를 일부러 읽은 적도 없었다.” 그는 믿었다.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내는 유일한 길은 위대한 삶인 것이다. 그 길이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비인간성, 부패와 타락에 대한 전면전에 시인 자신이 몸소 참가하는 길밖에는 없다.”(‘나는 이렇게 쓴다’ 중에서) 과하게 말해 그가 평소 시와 입에 가끔 올리던 표현을 따르자면 “개 같거나, 좆돼버린” 일일 것이다(그는 병상에서 죽어가며 “개 같은 세상 개같이 살다 개같이 간다”고 했다. 1972년 첫 징역을 선고받은 뒤 “좆돼버렸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을 기리는 더 많은 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했던 혁명과 세계관에 관련한 논의가 없어서다. 어디에도 그가 진정으로 목숨을 바쳤던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의 실천과 노선을 평가하고, 비판적이고 반성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동지들’의 행사는 없다. 그가 뼈 속까지 증오했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더욱 창궐하는데 그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그의 끝나지 않은 투쟁을 논하는 자리는 찾기 힘들다. 그가 혁명을 위한 무기로 생각했던 ‘시’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있는데, 그 목적으로 삼았던 ‘다른 세상’에 대한 논쟁은 없다. 다른 세상을 위해 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혁명적 조직’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생전에 ‘벗에게’라는 시에서 “참된 삶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로 향한 끊임없는 모험 속에 있다”고 말하고, “투쟁 속에서만이 인간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혁명은 실천 속에서만이 제 갈 길을 바로 간다”고 했는데, 변화된 세계 속에서 그 ‘실천 양식’은 어떠해야 하는가는 짚어지지 않는다. 그런 총체성이 거세당한 김남주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다시 배우고 무엇을 계승할 수 있을까. 어느 때나 선한 웃음을 잃지 않아 ‘물봉’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선생은 무척이나 구체적이고, 전투적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깔보면 바로 그 낫으로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라(‘종과 주인’)고 했던 이다.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산다고 노래하는 사람 따로 있고 노래를 위해/ 피를 흘리는 사람 따로 있는가라며 스스로 그 노래를 살고자 했던 사람이다. 권력 앞에서 꿇지 않는 무릎 없고/ 돈뭉치 앞에서 걷어올리지 않는 치마가 없고/ 부패와 타락이 그 본색인 부르조아 사회에서/ … / 누군가 턱짓 하나로/ 총칼의 숲을 이룬 수십만 군대를/ 제 사병처럼 부려먹을 수 있고/ 누군가 손가락 하나로/ 몽둥이와 방패로 무장한 수십만 경찰을 제 하인처럼 부려먹을 수 있고/ 누군가 지시 한마디로/ 꼭대기에서 말단까지 수십만의 관리를/ 일사천리로 부려먹을 수 있는 그런 기계적인 나라에서/ …/ 허위의 세계를 진실의 세계로/ 진실의 인간을 허위의 인간으로/ 날조하고 조작하고 왜곡하고 확대하고 축소하는/ 신문이며 라디오며 텔레비전을/ 누군가 한 사람이 독점하고 있는/ 그런 어두컴컴한 나라에서, “맨입의 빈손으로 표를 모아” 선거를 통해 “허위의 인간을 몰아낸다는 것”이, “착취의 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압제의 벽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환상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물질적인 힘은 물질적인 힘에 의해서만 무너진다”고 했던 전투적 인간이었다.(‘환상이었다 그것은’ 중에서) “투쟁 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 있었던가” 혹 그는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엔 감옥에서가 아니라 저 무덤 속에서 옹기종기 참새들 모여 입방아 찧는 소리를/ 들쑥날쑥 쥐새끼들 귀신 씻나락 까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우리에게 얘기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나는 묻고 싶다 그들에게/ 굴욕처럼 흐르는 침묵의 거리에서/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똥 누는 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들은 척척박사이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묻겠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달라 제우스에게 무릎 꿇고 구걸했던가/ 바스티유 감옥은 어떻게 열렸으며/ 센트 피터폴 요새는 누구에 의해서 접수되었는가/ 그리고 쿠바 민중의 몬까따 습격은 웃음거리로 끝났던가/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고통으로 끝났던가/ 루이가 짜르가 바티스타가 무자비한 발톱의 전제군주들 스스로 제 둥지를 떠났던가/ 팔레비와 소모사와 이아무개와 박아무개가/ 지 스스로 물러났던가/ 묻노니 그들에게/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서 투쟁 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이 있었던가 하고 지금 우리에게 다시 묻고 싶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나는 혁명시인/ 전투에의 나팔소리/ 전투적인 인간을 찬양한다// 나는 민중의 벗/ 나와 함께 가는 자 그는/ 무장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나 자신을 노래한다’ 중에서) 그런 실천을 위해 그는 고교 시절 이미 획일적인 반공교육에 반대해 자퇴했고, 검정고시를 통해 들어간 대학 시절 1972년 10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내 입이 더러워질까봐 그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박아무개”가 이른바 ‘유신’이라는 것을 선포했을 때 그에 반대하는 전국 최초의 반유신 지하신문 <함성>을 만들어 전국에 뿌리려 했다. 그 일로 ‘반국가단체 예비음모죄’로 체포돼 근 1년을 살고 나와야 했다. 다시 복학되었지만 말도 안 되는 교수의 수업을 받다 “허허허 허허허” 웃고는 영영 교정을 떠났다. 고향 전남 해남으로 내려가 지금은 고인이 되어 그의 망월동 묘역 옆에 함께 잠들어 있는 고 정광훈 선생, 홍영표, 윤기현 등과 함께 해남농민회를 만들고, 소설가 황석영, 최권행, 김상윤 등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를 만들기도 했다. ‘카프카’라는 서점을 만들어 광주 지역 학생운동의 거점을 만들기도 했으며, 어린 시절에 이미 무산자들의 무기가 될 프란츠 파농의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번역해 내기도 했다. 좀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을 위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들의 피 묻은 내의로 깃발을 만들기도 했다는 남민전의 전사로 가입하고 지하 활동에 나섰다. 투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벌들에게 빼앗긴 민중의 고혈을 되찾으러’ 동아건설 회장집 담을 넘어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 그를 수사관들은 ‘강도시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15년형을 받고 감옥을 사는 동안에도 그는 쉬지 않고 수백 편의 투쟁의 시를 써서 은밀하게 밖으로 내보냈고, 파블로 네루다와 하이네, 브레히트, 아라공 등의 시를 번역해 저항하는 이들에게 마음의 양식이 될 저항시선집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펴내기도 했다. 1988년 12월 9년3개월 만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그의 삶과 시를 폄하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를 변호한다는 옹색한 이유로 그에게도 ‘서정시’가 있었다고 별도로 김남주의 서정시를 펴내던 시절도 있었다. 그의 시를 ‘관념적’이고 ‘도식적’이라 폄하하거나, 너무 직설적이고 산문투여서 예술성이 담보되지 않는 단순 ‘선동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아예 ‘예술’의 울타리 밖으로 그를 밀어내려는 시도가 무수히 있어왔다. 거기에 맞서 그는 생전에 “애초에 나는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쓰지 않았다. 왜곡된 역사와 현실을 바르게 설정하고 지배계급의 허위 이데올로기를 폭로하여 진실을 밝히기 위한 방편으로 나는 시라는 무기를 잡았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의 시가 ‘너무 전투적이라는 독자의 역겨운 반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변하기도 했다.
1994년 2월16일 김남주 시인의 영결식이 끝난 뒤 지인들이 민족문학작가회의(서울 마포구 아현동) 사무실에 들러 고인이 생전 사용하던 책상 위에 영정과 국화꽃을 올리며 마지막을 배웅하고 있다(왼쪽). 1988년 12월21일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한 김남주 시인이 마중 나온 어머니 문일심씨 및 지인들과 함께 교도소 정문을 나서고 있다.한겨레 이정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