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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테러의 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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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0-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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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와 뒤이은 보복전쟁이 시작단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가 이제 그만 지겹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연일 신문이며 방송에서 호들갑을 떨며 테러와 일련의 사태를 아무리 실감나게 전해준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여파가 우리의 일상에까지 미칠 깊숙한 파장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우리에게 테러는 처음처럼 실감나지 않는다.

일탈을 일상화하는 메커니즘

따지고보면 그 테러가 테러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일상적인 행위에서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그것도 다른 어느 행위보다 일탈적이다. 그리고 신문이며 방송의 뉴스가 있는 까닭은 그 일탈적인 행위를 보여주는데 있다. 아마 테러를 둘러싼 일련의 도덕적 잣대와 정치적 입장을 벗어버리면 이 전대미문의 테러가 사건을 소비하는 현대의 사회적 절차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테러사건만큼 섬뜩하게 표현하자면 테러는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사건을 소비하는 훌륭한 아이템으로 작용할 뿐이다. 새삼 테러와 보복에 옳으니 그르니를 따져보지는 말자. 입장과 태도는 다르겠지만 아무리 잘 이야기한다고 해도 공개적 이성으로는 테러를 저지른 당사자의 부당성을 전제하면서 보복전쟁을 치르는 국가의 자성을 촉구하는 따위의 수준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시작과 끝이 모두 테러로 귀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억할 것이다. 처음에 멀리서 다소 흐릿하게 잡은 폭파장면은 어느새 점점 더 자극적이고 실감나는 화면으로 수없이 되풀이된다. 아마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방송사는 혈안이 되어 있었을 것이며, 입수된 화면 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가장 자극적이며 따라서 가장 선명하고 컬러풀한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수천명의 인명이 사라진 현장을 생생하고 실감나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화면이 강렬할수록 그 감동적인 이미지의 여운이 짙게 남으면 남을수록 그 이미지는 가상의 현실처럼 등장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사건의 전개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영화나 게임의 한 장면처럼 소비되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뒤이은 미국의 보복공습은 토마호크의 극적인 발사장면으로 시작된다. 그것이 비행기가 빌딩에 부딪히고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자극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마 뉴스를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급기야는 미국이 지상군을 투입하면서 <다이하드>와 같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자문을 구했다거나 전문 의사까지 동원하며 오사마 빈 라덴의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관심을 끌고 있지만, 더이상 스펙터클의 이미지를 찾지 못하면, 그리고 보복전쟁이 우리의 일상에 엄청나게 압박을 가하리라는 ‘협박의 빌미’를 찾지 못하면 언론은 잠잠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직 그럴 때가 오지 않았는데도, 이미 더이상 극적인 장면을 상실한 테러사건은 점차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테러 역시 사건을 소비하는 방식에 길들여진 눈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현대사회에서 언론, 특히 보도의 역할은 일상에서의 일탈적인 사건을 소비적 절차를 통해 다시 일상의 영역으로 되돌려주는 데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이런 소비방식에 길들여지지 않으면 일상에서의 불안을 해소할 길은 없어보인다. 테러와 같은 비사회적 일탈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언론을 통해 테러를 소비하는 사회적 일탈을 문명으로 구분하는 것이 바로 현대사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삶을 규정짓는 문화의 성격은 바로 일상을 구조화시키는, 즉 일탈을 예상가능한 확실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일탈을 조직하고 재배치하는 방식이 정치적 변화, 정책의 결정, 경제적 변동, 문화의 생산방식을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탈을 일상화시키는 메커니즘으로서의 언론은 충실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언론의 테러?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사건을 소비하는 메커니즘이 적절한 방식을 구사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건이 터지면 현장에 달려가 흥분된 목소리로 사건의 내용을 실감나게 전하고(신속), 친절하게 재현화면이나 입체화면을 만들어(정확) 내보낸다. 이어 피해자가 울부짖는 장면을 내보내고(감동), 뒤이어 사태 당사자들의 인터뷰와 해설(분석)로 마감한다. 이런 상투적 공식은 그 사이사이에 스펙터클한 장면으로 채워지며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번 테러를 소비하는 절차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그 절차만큼이나 위험할 정도로 단호하게 상투적 도덕심으로 채워지는 언론의 입장은 소비의 주체를 맹목적인 소비에 머물게 한다. 그것이 미국의 테러사건보다 더 심하게 우리의 일상에 가해지는 테러일지도 모른다.

언론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소비방식에 이미 길들여졌다면 우리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할 것이다. 일상에 가해지는 내일의 테러를 기다리면서.

김진송/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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