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카드·롯데카드·농협카드에서 대규모 금융정보가 유출된 사실이 알려진 가운데, 1월24일 오후 서울의 한 카드회사 영업점 개인정보 비상 상담실에서 직원이 카드 재발급 업무 상담을 하고 있다.한겨레 박종식
회사 쪽 “오히려 이익이 되는 기회 제공” 재판이 진행되면서 신용정보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은행 거래를 시작하면서 ‘신용정보 조회 동의’를 하면 금융기관이 신용정보집중기관에 조회해 신용도를 판단한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제 전국은행연합회는 전 금융기관으로부터 금융거래를 하는 모든 신용정보를 모은 다음, 주기적으로 CD에 저장해 모든 금융기관에 배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금융기관은 금융거래 정보가 있는 국민의 신용정보 데이터베이스를 통째로 가졌고, 이를 조합·편집해 명단을 만드는 것도, 그렇게 만든 명단으로 대출영업 전화를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불법 유출만 없으면 국가에서 신용정보를 소중히 보존하고 신용도 판단 목적으로만 조회할 것이라 순진하게 믿고, 귀찮은 대출영업 전화는 내 정보를 누군가 나쁜 목적으로 유출했기 때문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정보 주체’들, 그러니까 나와 내 고객들은 충격을 받았다. 원고들은 신용정보 사용이 법이 허용하는 ‘신용도 판단을 위한 이용’과는 거리가 멀고, 활용된 주소와 전화번호 등은 더 이상 ‘신용도 판단을 위한 신용정보’가 아니라 영업을 위한 ‘연락처’로 전락했으며, 신용정보법에서 금융기관에 특별히 인정한 ‘신용정보 이용자’로서의 지위를 악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회사 쪽은 ‘원래 신용정보제도가 그렇게 운영되므로, 합법적으로 받은 데이터를 활용하는 방법 자체를 뭐라 할 수 없다’며 맞섰다. ‘이자가 더 싼 대출로 바꿀 수 있는 기회이니 오히려 이익이 된다’거나 ‘실제 발생한 손해가 없다’고도 했다. 재판이라는 게 원래 유리한 주장은 뭐든 다 하는 것이지만 회사 쪽이 법원에 제출한 신용정보 이용에 관한 잘못된 생각이 진짜 금융기관·대기업의 개인정보에 관한 생각이라면, 앞으로 내 개인정보 보호는 어떻게 될지 심히 걱정됐고, 다른 금융기관의 모범이 돼야 할 국내 굴지의 보험회사가 타 금융기관과의 거래 정보를 문서화해 자사의 영업 목적으로 위법하게 이용하고 그런 신용정보 이용도 ‘적극적 활용’의 한 형태로 적법하다며 다투는 것을 보면, 소비자가 기업을 믿을 수 있는 진짜 ‘신용사회’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법원은 “거래 관계 설정 및 유지 여부 등에 관한 판단 목적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신용정보를 활용하는 것에 동의한 것은 아니고,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영업이라고 하더라도 신용정보 활용으로 다른 서비스를 제공받을지 여부는 그 위험성에 관한 충분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고객의 선택에 맡겨야 하는 것이지 영업 주체가 임의로 결정할 것은 아니다”며 원고 청구를 인정했고, 이 판단이 항소심과 대법원에서도 유지됐다. “동의 없이 활용해서는 안 됨”의 역효과 그러나 뜻이 좋다고 파생되는 결과가 모두 바람직하란 법은 없는지, 신용정보를 처음 수집한 목적과 달리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받아냈지만 처음에 가장 심각하게 문제 삼았던 ‘통 CD 배포 방식’의 신용정보 시스템은 변하지 않았고, “동의 없이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법원의 판단은 각 금융기관이 신용정보 활용 동의서에 ‘영업 목적의 활용’까지 추가하게 되는 엉뚱한 결과를 가져왔다. 금융법이 소비자 권리를 보호하는 쪽이 아니라 금융업자들이 좀더 편하고 쉽게 영업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변해가는, 씁쓸한 모습이었다. 지금 펼쳐지는 금융정보 유출 범람 사태 역시 이렇게 편하게 정보를 집적하고 이익을 위해 쉽게 공유해도 된다는 생각이 빚어낸 참사인 것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이 제정돼 상당한 제한이 가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신용사회 구축’을 통해 금융거래를 활성화한다는 명목으로 신용정보에 대해서는 특별한 예외를 인정하는 편이라니 더더욱 걱정이다. 김진 변호사·법무법인 지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