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야만
등록 : 2001-10-09 00:00 수정 :
잿빛의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영구적 자유’를 내세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이 개시되고 심리전·선전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야만적 테러와의 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는 부도덕한 미국과의 성전이라고 서로 정의를 주장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라고 할 정도로 분쟁과 대립으로 점철돼 왔습니다. 20세기에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렀으며, 그뒤로도 세계 곳곳에서 종족간, 국가간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촌은 얼마 전 새 천년을 맞아 평화와 번영을 염원했습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의 지도자들이 21세기에는 이전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내보냈습니다. 그러나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이 다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은 매우 다층적입니다. 두 나라는 지구의 반대편에 있고, 세계 최강국과 최빈국이며, 기독교국가와 이슬람국가라는 대척점에 있습니다. 싸울 이유도, 만날 이유도 없어 보이는 두 나라의 대립은 복잡하게 얽힌 지구적 모순을 반영합니다. 전쟁의 성격도 시작도 끝도 분명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빈 라덴이 테러에 관련됐다는 증거가 있다며 상당한 인내와 치밀한 준비 끝에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렇지만 군사적 접근은 아무리 세련된 방법이라고 해도 결국 또다른 테러일 수 있습니다.
폐허가 바닥까지 드러난 테러참사 현장과 달리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은 가상현실처럼 보입니다. 미디어 전쟁을 서방언론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난 1991년 걸프전 당시 100시간 만에 이라크에 15만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 편 아니면 적의 편’이라는 이분법으로 줄을 세운 결과 팍스아메리카나 체제의 정점에 서게 됐지만, 힘이 센 만큼 속은 허해 보입니다.
테러의 뿌리를 뽑겠다고 나섰을 뿐 테러가 배양된 토양에 대한 성찰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400억달러를 들여 피의 보복을 하는 미국을 강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국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서방국가들의 ‘강력 지지’라는 메이저리그도 미국의 한쪽에 치우친 정의를 온전히 떠받쳐주지 못합니다. 주요국의 정부는 미국의 기대 이상으로 미국 편에 섰지만, 세계의 시민들은 미국도 급하면 별수 없구나 하고 기대를 접을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명확한 대상을 목표로 해야 하고, 무고한 시민들이 다쳐서는 안 되며, 평화가 빨리 회복되기를 바란다”는 중국 외교부의 예외적인 코멘트가- 정치적인 고려를 배제하면- 현재로선 무한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는 더이상 통용될 수 없습니다. 전쟁과 테러는 문명사회가 버려야 할 야만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