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시절 형제복지원에 2년가량 갇혀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던 김수철(44·가명)씨는 가족에게도 이런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정용일
부랑인 단속 건수로 평점 받은 경찰 1987년 2월3일치 <동아일보>엔 형제복지원 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폭로가 보도된다. 양아무개(당시 26살)씨는 경찰관으로 일하는 부산 형님 집에 가던 중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하기 위해 부산역 앞 지하도로에 갔다가 복지원으로 끌려갔다. 서울에 사는 서아무개(당시 32살)씨는 고교 졸업 뒤, 무전여행 중에 부산역 앞에서 새우잠을 잔 것이 구금의 이유가 됐다. 복지원으로 향할 당시, 성인이던 이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고 털어놨다. 1986년 어느 날, 김수철씨는 열댓 명 무리에 섞여 5m가 넘는 복지원 담을 넘었다. 누군가가 미리 사다리를 놔둔 모양이었다. 복지원 마크가 선명한 옷을 입은 채 도망쳤다. 경비원들이 쫓아오는 모습을 보곤 겁에 질려 덤불 속에서 5~6시간을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우연히 찾은 철길을 따라 어두운 삶의 터널로 들어섰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소년은 구두닦이, 중국집 종업원으로 떠돌았다. 집을 찾아달라며 경찰서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복지원으로 보내질 것이 뻔했다. 가족을 다시 만난 건 18살이 되던 해였다. 어느덧 소년은 제 삶을 책임져야 하는 성인의 문턱에 섰다. 19살 땐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대어 교도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았지만 불행은 늘 그의 발목을 잡았다. 변변한 직장을 갖기는 쉽지 않았다. 10여 년 전, 아내와도 헤어졌다. “생각해보면, 형제복지원에 갇힌 게 어처구니가 없어요. 형님 집에 있었더라면 기술이라도 제대로 배우지 않았을까요.” 험난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그는 내내 차분했다. 복지원에서 생활한 이후, 제 주장을 펴지 못한다고 했다. 일상화된 폭력은 어떤 식으로든 흉터를 남겼다. 현재는 박인근 원장 아들이 대표 뉴스는 보지만, 선거엔 참여하기 싫었다고 했다. 나와는 무관한 세상이었다. 그러던 그가 올여름, 형제복지원을 다시 떠올린 건 또 다른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38)씨의 용기 때문이다. 지난해 봄,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제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라는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하던 한씨에게 다가갔다. 1984년 12살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간 9살 소년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아이>란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뒤이어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등 여러 단체들을 중심으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준비모임’이 꾸려졌다. 이들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피해자들의 증언과 사건 관련 기록을 수집하고 있다. 향후, 정부의 사건 진상 규명과 사과를 촉구할 계획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유명한 일이었다. 2000년대에 미흡하나마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사건의 진실은 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일까. “1987년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이 구속 기소되면서 개인적 비리·횡령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부랑인이나 걸인 등은 ‘수용돼야 하지 않느냐’는 의식이 우리 사회에 깔려 있어, 이 사건 자체를 국가 차원의 인권침해 범죄라고 보질 못한 것이다. 더구나 1987년은 격변기였던지라 빠르게 노출됐지만, 빠르게 감춰져버린 사건이다.” <국가범죄>의 저자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분석이다. 피해 당사자인 수철씨조차 자신이 겪은 험한 일이 ‘범죄’라고 여기지 못했다고 털어났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국가권력과 시민사회로부터 이중으로 배제된 ‘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김계원이 죽음에 이르기 두 달 전, 1987년 1월 당시 부산중앙지검 울산지청 소속 김용원 검사(현 변호사)는 박인근 원장을 업무상 횡령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아침, 부산시장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박 원장 구속되면 안 됩니다. 빨리 석방해야 합니다.” 상부에선 수사 축소를 종용했다. 박 원장은 7차례의 재판 끝에 2년6개월형을 받고 1989년에 석방된다. 대법원은 두 번에 걸쳐 그가 ‘불법’ 감금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박 원장은 옥중에 있었지만, 부산시는 법인을 살려두었다. 몇 차례 간판만 바뀐 뒤 현재의 형제복지지원재단이 됐다. 박 원장은 2011년까지 해당 법인 이사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아들 박천광(38)씨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서민들의 서러운 돈이 이 법인으로 흘러든 정황도 포착됐다. 2005년 법인은 수익사업부 증축 공사비 명목으로 ‘부산상호저축은행’에서 장기 차입을 시작해 2009년까지 118억원을 대출받았다. 지난해 부산시는 차입금과 관련해 특별점검을 실시했다. 118억원에 대한 입출금 내역이 명확하게 관리되지 않고, 40여억원은 사용 용도조차 불분명했다. 별도의 회계감사조차 받지 않았다. 진상 규명 위한 특별법 등 필요 “국가가 사과를 했으면 좋겠어요.” 김수철씨의 소박한 바람은,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등 제도가 마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2013년 10월25일 현재, 용기를 내 대책위 준비모임 쪽으로 연락을 해 온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실종자 가족을 포함해 31명이다. “형제복지원 이야기 많이 좀 써주세요. 기사화되면 또 다른 피해자들도 나올 것 같아요.” 발걸음을 옮기던 김수철씨의 당부였다. 26년 동안 숨죽여 살아온 사람들의 고통을 또다시 외면할 것인가. 1987년 그때처럼, 갈림길에 서 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