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잊혀진 국왕의 소망
등록 : 2001-09-26 00:00 수정 :
“수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자유와 인권을 위해 소중한 생명을 바쳤는데도 외국에서 온 테러분자들 때문에 조국의 평화와 안정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미국 동시다발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하고 있는 아프간 탈레반 정권에 대한 미국의 보복공격이 임박하면서 쿠데타로 왕권을 빼앗긴 뒤 28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모하메드 자히르 샤(86) 아프간 전 국왕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테러 배후와 후원국가들을 끝까지 찾아내 응징하겠다”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말처럼 미국의 보복공격은 곧 탈레반 정권의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안팎의 예상에 부응이라도 하듯 자히르 샤 전 국왕은 9월20일 영국
와의 기자회견에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족장회의인 ‘로야 지르가’를 열고 지도자를 선출한 뒤 과도정부 구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이슬람의 교리와 가르침에 따라 절제와 관용 속에 살아왔으며, 전통에 위배되는 테러에 반대해왔다”면서 “조국이 위기에서 벗어나 결백을 주장할 수 있도록 전 국민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3년 아버지인 나디르 칸이 암살당한 뒤 국왕 자리에 올라 40년동안 아프간을 통치했던 자히르 샤는 개혁정치와 외세에 대한 독특한 중립정책을 펴며 아프간의 평화를 이끌어냈다. 어릴 적부터 프랑스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며 일찌감치 서구문명을 접했던 그는 재임기간 동안 의회선거를 실시하고 왕족의 고위공직 취임을 금지시키는 개혁정치를 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미·소 냉전 시절에도 중립정책을 펴 전쟁을 ‘수완좋게’ 피하고 원조를 이끌어내는 등 아프간의 평화와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이 때문에 그는 89년 당시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군이 10년 만에 철수했을 때도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과도정부의 수반 자리를 제의받았지만 “때가 아니다”라며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히라 샤 전 국왕은 73년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 했던 개혁정치에 반발한 사촌 모하마드 다우드가 일으킨 쿠데타로 정권을 빼앗긴 뒤 지금까지 이탈리아 로마 교외의 한 별장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상록 기자/ 한겨레 국제부 myzod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