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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구동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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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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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불허의 무협소설처럼 전개되는 요즘 정치를 보면, 짜릿한 재미도 재미거니와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를 무기로 삼는 전략을 취하면서 이른바 ‘석유파동’이 일어났을 때,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이야기했었다. 그는 이후 자신의 저서에서 현대는 예전처럼 확신에 찬 경제학자도, 자본주의자도, 제국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존재하지 않는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지금 우리의 정치가 그렇지 않나 싶다. 여야 모두가 확신에 찬 신념도, 정책도, 청사진도 없는 불확실성의 정당이고, 정국의 앞날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투명하다.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의원까지 꿔주면서 눈물나는 공조를 보여준 것이 불과 1년 전이데, 장관 한명의 거취문제 때문에 극단적으로 대결하고 갈라선 것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정치판의 가혹함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중국의 통 큰 외교에서 배우자

장관해임문제로 공동여당은 시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결별을 선택했다. 원래부터 동상이몽이었고, 서로 다른 색깔의 두 정당이었기에 결별 자체가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차라리 새로운 판짜기를 통해 정치판에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났으면 싶은 것이 솔직한 바람이지만, 결국 정계개편도 스토리 전개의 변화없이 몇몇 주연배우들만의 교체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좁은 나라에서 남북으로 갈라진 지 반 세기, 그나마 남쪽에서는 보수-진보와 동서의 갈등, 인물싸움 등이 복잡하게 얽혀 도대체 정치적 불신과 분열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우리의 정치현실을 생각하면 앞날이 걱정스럽기만 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이래, 한번도 ‘통 큰 정치’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대범한 정치를 보고 싶은 국민들의 바람은 간절하기만 할 것이다. 수시로 갈라서고 다시 손을 잡는 정가의 모습을 보며 이제는 정말 큰 정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정치판에서의 합종연횡이나 이합집산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원칙없는 정략만이 판친다는 것이다. 정당은 있되 정책이 없고, 정치꾼은 있되 정치인이 부재하기 때문에 원칙도, 정도도 없는 이전투구식의 정쟁만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 집권 시절 국가경제가 파산하는 IMF를 맞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더니, 야당이 되고부터 사사건건 책임론을 내세우는 것은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하듯이, 여당도 지역·연고·정실주의에 입각한 인사를 남발해왔고, 끊임없이 공안사범을 양산해왔으며, 지금도 국리민복보다는 정권재창출을 위해 더 고심하고 있는 듯하다.


왜 그렇게 큰 정치를 하지 못하는 걸까. 대타협, 대연정, 상생의 정치는 정말 불가능한 걸까. 정치적인 시각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무조건 반대부터 해야 하는 걸까. 공동정부가 출범할 당시부터 정치구도가 불안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공동정부는 차이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의도 자체로서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공조라는 것이 가능하자면, 서로간의 차이를 넘어 공동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려는 대국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큰 정치를 위해,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 ‘구동존이’의 자세를 제안하고 싶다. ‘구동존이’는 중국외교의 대원칙이다. 외교가에서 중국외교는 대범하고 통이 크기로 정평이 나 있다. 중국은 힘의 외교를 펼쳐온 미국이나 내정개입을 일삼았던 옛 소련과는 사뭇 다른 외교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구동존이’(求同存異: 추퉁춘이), 다른 점이 있더라도(存異) 같은 점을 취하면서(求同) 이견을 좁혀 나간다는 이 원칙이 중국외교의 저변에 깔려 있는 철학이다.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찾자

사람사는 세상에 ‘차이’란 게 없을 수는 없다. 또 차이는 언제나 갈등과 분쟁을 야기한다. 하지만 진정한 민주주의와 평화는 차이를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라고 했던 볼테르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공존과 관용없이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인간관계에서도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태도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생각건대, 가장 나쁜 사람은 ‘사소한 차이를 극대화’하려는 사람이고, 가장 나쁜 정치는 ‘정치적 이견을 극대화’하려는 정치이다. 아무리 차이가 크더라도 조그마한 공통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차이에만 집착한다면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구동존이의 자세로 공동의 이익을 먼저 내세운다면 대범한 정치, 상생의 정치는 충분히 가능하다. 남북관계 역시 남북간의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찾아가려는 노력에 의해서만 진정한 관계개선이 가능할 것이다.

최연구 / 국제관계학 박사·포항공대 대우강사 www.postech.ac.kr/∼choi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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