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다. 오늘 할 일을 떠올린다. 며칠 째 제자리걸음인 마감을 끝내야 한다. 오전에는 까다로운 취재가 잡혀 있다. 분주한 하루다. 집을 나서는 길, 편의점에 가 초코우유를 하나 산다. 이걸 마시면 좀 나으려나.
“매일 아침 초코우유 한 잔씩 마시는 거죠.”
“7년 동안 한 번도 못 쉬었어요”
남동윤(32)씨는 그리한다고 했다. 일러스트레이터인 동윤씨의 작업량은 엄청나다. 새벽에 일하다 지쳐 잠이 들어 아침이면 편집 담당자 전화에 잠이 깼다. 숨 돌릴 시간조차 없는 하루를 기다리는 아침마다 그는 초코우유를 마셨다고 한다. 일종의 마인드컨트롤이다.
“많으면 동시에 스무 가지 마감을 진행할 때도 있었어요. 1시간은 이 마감 하고 다른 1시간은 저 마감 하고. 학교 수업을 하듯이 1교시, 2교시, 3교시 나눠서.”
주 7일 근무에 밤샘도 잦았다. 한 직장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랬다. 그는 일정표를 보여줬다. 마감해야 할 작품들이 빡빡하게 적혀 있었다. 작업을 완료하면 검은 펜으로 덧칠한다. 한 장짜리 일러스트 작품만 하는 것이 아니다. 캐리커처도 그리고, 어린이 만화도 한다.
그토록 많은 일을 하게 된 까닭은 집안 사정에 있다. 고3 때, 집이 부도를 맞았다. 처음에는 그런 형편을 잘 몰랐다. 만화학과에 진학해 대학에 갔고, 군대에 갔다. 집안 사정이 눈에 보인 것은 군대를 다녀와서다. 빚을 갚아야겠다 생각했다. 복학 전, 주말에는 영화관 앞에서 캐리커처 그리는 일을 했다. 평일이면 스티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학원에 가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니까 일만 했다. 복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시간표는 아르바이트 시간에 맞춰 짜였다. 장학금을 받아야 했으니 학점이 잘 나올 만한 과목만 골라 들었다.
“지겹죠. 7년 동안 한 번도 못 쉬었어요.”
프리랜서 일 자체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일러스트 분야는 진입 문턱은 낮으나, 경쟁이 심해 초반 3년을 버티기 힘들다고 한다. 오랜 경력이 인정받는 분야도 아니다. 독창적이고 신선한 것에 늘 목말라하는 곳이다. 경기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글이나 사진보다 일러스트는 자금 사정을 이유로 지면이 사라지기 더 쉽다. “제가 한 달 쉬면 100% 장담하는데 일이 반쯤 끊길걸요.” 그래서 일을 줄이지 못했다. 일에 치인다. “제가 되게 낙천적이었거든요. 아무래도 안 쉬고 1년에 몇천만원씩 모아 빚을 갚아야 하니까 스트레스를 받을 거 아니에요. 제가 ‘아, 너무 행복해’ 하면서 빚을 갚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너무 좋아’ 하면서 일만 하진 않았을 거고요. 그러면서 제 상태가 안 좋아졌어요. 강박증이 심해지더라고요.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지고. 서른 살이 됐을 때, ‘아, 내가 이렇게 일만 하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일은 못 멈추고, 계속 불안하니까.” 휴식도 일처럼 하는 사람 어떻게 견뎠느냐고 하니, 북한·아프리카 일부 지역 등에서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떠올렸단다. “언제는 포스트잇에 ‘아이티인들을 생각하자’라고 써서 붙여놨어요. 그거 본 사람들이 이게 뭐냐고 한마디씩 하고 가고. 저도 몰랐는데, 그 사람들을 보며 더 힘든 사람도 있다 이렇게 위안을 받고 있었나봐요.” 그는 웃었다. 힘겨운 마음에 찾은 상담사는 그에게 “진짜 효도는 네가 희생하는 게 아니라, 네가 행복한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주는 거다”라고 말했다. 차츰 생각이 바뀌어갔다. “옛날에는 학원 제자들이 자고 있으면 ‘니 지금 자는 긴가? 니 나이 때는 안 자고 무조건 열심히 하는 거다’ 했는데, 요즘은 ‘좀 쉬면서 해라’ 그래요. 열심히 하는 것이 최고다 하는 강박이 많잖아요.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그 나이 때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있고, 그 나이 때만 즐길 수 있는 즐거움이 있잖아요.” 그것들을 누려보지 못해 조금 후회가 된다. 다른 친구들이 여행을 가고 그림을 고민하던 시절에 그는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를 걱정하며 보냈다. 이제 빚도 갚고 생활도 안정되었으니 여유롭게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놀려고 하니, 취미조차 없다. 일만 하느라 취미 하나 가질 생각을 못했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휴식을 한다. 그는 만나고 싶은 사람들 이름이 적혀 있는 목록을 보여준다. 그들을 만나면 마감을 끝냈을 때처럼 검게 칠한다. 휴식도 일처럼 한다. 노는 습관이 들지 않은 탓일지 모른다. 여유롭게 살겠다 해놓고 요즘도 주 5일은 꼬박 일만 한다. 못해본 것이 많다 하여 요즘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가정을 꾸리고 싶단다. 아이 손잡고 ○○마트 가는 것이 꿈란다. 그거 한 번 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그러다 “아, 내가 죽으면 남은 가족은 어떻게 하나? 보험금은 남기고…” 이런다. 그는 소박하고 유쾌하다. 그리고 늘 어깨가 무거운 사람이다. 동윤씨는 평범하고 안온한 인생을 꿈꿨다. 어릴 적 꿈도 과학자, 대통령, 검사 따위가 아니었다.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아이들에게서 작은 기쁨을 얻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동윤씨는 캐리커처 작업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림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웃고 좋아한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자기 얼굴 그림을 보고 노인은 쑥스러워하고, 아이는 웃는다. 같이 일하는 동료, 자주 가는 가게 주인의 얼굴을 그려준다. 길에서 본 사람을 그려 무작정 선물로 주기도 한다. 어느 날은 집 떠난 엄마를 둔 아이의 그림을 그려, 그 엄마에게 보내주기도 했단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안온을 작은 웃음에서 찾았다. 작은 안온을 위한 무거운 짐 살다보면, 평범한 사람들이 작은 안온을 위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는지 알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작은 기쁨을 잘 지켜오고 있다. “지금까지 한 것만 해도 감사하죠. 어쨌든 빚도 갚고 돈도 모았잖아요. 그것만 해도 안 믿길 때가 있거든요. 불과 7~8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이제 집도 많이 안정됐고, 저도 그러니까.”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사람들이 웃기를바라고, 안온한 삶을 원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사람이, 조금 덜 일하고 조금 더 행복하길 바란다. 글 희정 제2회 손바닥문학상 수상자
남동윤씨는 원래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는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아이들에게서 작은 기쁨을 얻고 싶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프리랜서 일 자체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일러스트 분야는 진입 문턱은 낮으나, 경쟁이 심해 초반 3년을 버티기 힘들다고 한다. 오랜 경력이 인정받는 분야도 아니다. 독창적이고 신선한 것에 늘 목말라하는 곳이다. 경기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글이나 사진보다 일러스트는 자금 사정을 이유로 지면이 사라지기 더 쉽다. “제가 한 달 쉬면 100% 장담하는데 일이 반쯤 끊길걸요.” 그래서 일을 줄이지 못했다. 일에 치인다. “제가 되게 낙천적이었거든요. 아무래도 안 쉬고 1년에 몇천만원씩 모아 빚을 갚아야 하니까 스트레스를 받을 거 아니에요. 제가 ‘아, 너무 행복해’ 하면서 빚을 갚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너무 좋아’ 하면서 일만 하진 않았을 거고요. 그러면서 제 상태가 안 좋아졌어요. 강박증이 심해지더라고요.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지고. 서른 살이 됐을 때, ‘아, 내가 이렇게 일만 하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일은 못 멈추고, 계속 불안하니까.” 휴식도 일처럼 하는 사람 어떻게 견뎠느냐고 하니, 북한·아프리카 일부 지역 등에서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떠올렸단다. “언제는 포스트잇에 ‘아이티인들을 생각하자’라고 써서 붙여놨어요. 그거 본 사람들이 이게 뭐냐고 한마디씩 하고 가고. 저도 몰랐는데, 그 사람들을 보며 더 힘든 사람도 있다 이렇게 위안을 받고 있었나봐요.” 그는 웃었다. 힘겨운 마음에 찾은 상담사는 그에게 “진짜 효도는 네가 희생하는 게 아니라, 네가 행복한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주는 거다”라고 말했다. 차츰 생각이 바뀌어갔다. “옛날에는 학원 제자들이 자고 있으면 ‘니 지금 자는 긴가? 니 나이 때는 안 자고 무조건 열심히 하는 거다’ 했는데, 요즘은 ‘좀 쉬면서 해라’ 그래요. 열심히 하는 것이 최고다 하는 강박이 많잖아요.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그 나이 때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있고, 그 나이 때만 즐길 수 있는 즐거움이 있잖아요.” 그것들을 누려보지 못해 조금 후회가 된다. 다른 친구들이 여행을 가고 그림을 고민하던 시절에 그는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를 걱정하며 보냈다. 이제 빚도 갚고 생활도 안정되었으니 여유롭게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놀려고 하니, 취미조차 없다. 일만 하느라 취미 하나 가질 생각을 못했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휴식을 한다. 그는 만나고 싶은 사람들 이름이 적혀 있는 목록을 보여준다. 그들을 만나면 마감을 끝냈을 때처럼 검게 칠한다. 휴식도 일처럼 한다. 노는 습관이 들지 않은 탓일지 모른다. 여유롭게 살겠다 해놓고 요즘도 주 5일은 꼬박 일만 한다. 못해본 것이 많다 하여 요즘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가정을 꾸리고 싶단다. 아이 손잡고 ○○마트 가는 것이 꿈란다. 그거 한 번 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그러다 “아, 내가 죽으면 남은 가족은 어떻게 하나? 보험금은 남기고…” 이런다. 그는 소박하고 유쾌하다. 그리고 늘 어깨가 무거운 사람이다. 동윤씨는 평범하고 안온한 인생을 꿈꿨다. 어릴 적 꿈도 과학자, 대통령, 검사 따위가 아니었다.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아이들에게서 작은 기쁨을 얻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동윤씨는 캐리커처 작업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림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웃고 좋아한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자기 얼굴 그림을 보고 노인은 쑥스러워하고, 아이는 웃는다. 같이 일하는 동료, 자주 가는 가게 주인의 얼굴을 그려준다. 길에서 본 사람을 그려 무작정 선물로 주기도 한다. 어느 날은 집 떠난 엄마를 둔 아이의 그림을 그려, 그 엄마에게 보내주기도 했단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안온을 작은 웃음에서 찾았다. 작은 안온을 위한 무거운 짐 살다보면, 평범한 사람들이 작은 안온을 위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는지 알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작은 기쁨을 잘 지켜오고 있다. “지금까지 한 것만 해도 감사하죠. 어쨌든 빚도 갚고 돈도 모았잖아요. 그것만 해도 안 믿길 때가 있거든요. 불과 7~8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이제 집도 많이 안정됐고, 저도 그러니까.”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사람들이 웃기를바라고, 안온한 삶을 원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사람이, 조금 덜 일하고 조금 더 행복하길 바란다. 글 희정 제2회 손바닥문학상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