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민간인 학살 ‘희생자 복권’

376
등록 : 2001-09-11 00:00 수정 :

크게 작게

한국전쟁 전후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명예회복 위한 통합입법 발의

사진/ 구천에 떠도는 민간인 희생자의 원혼을 풀어라! 지난해 8월 충북 영동에서 열린 민간인 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이정용 기자)
반세기의 침묵이 깨어지고, 국가폭력에 희생된 민간인들의 명예가 회복될 것인가? 지난 9월6일 오랜 산고 끝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통합특별법’(이하 통합특별법)이 발의됐다. 여순, 문경, 함평 등 11개 지역별로 추진돼오던 특별법을 단일 법안으로 묶은 것이다.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을 대표발의자로 한 이 법안은 여야 의원 48명의 서명을 받았다. 통합특별법은 지난 1월 ‘민간인학살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준비위원장 한상범)가 입법청원을 냈고, 5월 국회 공청회를 거쳤다.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114만명의 불명예

김원웅 의원은 “민간이 학살사건이 드러날 때마다 입법을 하게 되면 개별입법이 산재하게 될 것”이라며 “통합입법을 통해 총체적인 진상조사와 피해자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입법취지를 설명했다. 지금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특별법이 제정된 예는 제주 4·3사건과 거창사건이 있다. 그러나 민간인 학살에 관한 통합입법 논의는 4·19 직후인 지난 60년 국회에서 논의되다 이듬해 5·16으로 좌절됐다. 당시 결성된 피학살자 유족회 회원으로 추산하면 희생자는 114만명에 이른다.


9월6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원웅 의원은 “국민정서를 고려해 ‘민간인 학살’이 아니라 ‘민간인 희생사건’으로 이름붙이게 되었다”며 “가해자처벌이나 국가배상보다는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에 초점을 맞춘 법안”이라고 소개했다. 통합특별법은 민간인 희생사건의 시기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부터 한국전쟁의 휴전이 성립한 1953년 7월27일까지로 못박고 있다.

가해주체는 국군, 경찰 및 기타 공무원과 한국전쟁에 참여한 연합군뿐 아니라 유사군사조직원, 비정규전투원을 모두 포함한다. 학살 동기도 작전수행과 군사작전으로 한정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자행된 조직활동 전반에 걸쳐 있다. 희생자는 사망자, 행방불명자 또는 고문·강간을 당하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을 포괄한다. 단, 물적 피해만 입은 사람은 희생자 개념에서 제외해 국가 보상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통합법안은 대통령 소속하에 민간인 희생사건을 담당할 위원회 설치를 명시하고 있다. 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 업무에 과거청산이 제외된 점을 고려해 독립위원회로 설치하도록 돼 있다. 위원장 1인을 포함한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장완익 변호사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같이 동행명령장을 위원회 결의로 발부하도록 하면 필요할 때마다 위원들이 모여 결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비효율적이다”라며 “위원장 권한으로 동행명령장을 발부하도록 정했다”고 밝혔다. 법원에 구인영장을 청구하도록 하는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형사소송법 개정이 필요한 이유로 유보되었다. 조사기간은 진상조사 개시일부터 2년으로 정했다. 필요하면 6개월씩 2회 연장이 가능하도록 했다.

국가배상 언급없어… 이제 첫걸임일 뿐

가해자 처벌과 국가배상 문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희생자 및 그 유족에 대한 간접보상 형식으로 생활지원금 및 의료지원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김원웅 의원은 “민간인 희생자가 100만명을 넘어 국가배상 규모가 너무 커진다”며 “배상 규모 탓에 여론의 반발을 사면 법안 통과가 어려울 수 있어 우선 진상규명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의원은 “진상규명을 통해 학살의 잔혹성이 알려지면 자연스럽게 배상을 촉구하는 여론도 조성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 모인 피해자 유가족 중 일부는 “명예회복은 배상을 통해 최종적으로 이뤄진다”며 “배상없는 특별법은 의미가 없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피해자와 시민사회단체가 요구해온 법률에는 못 미치지만, 통합특별법의 발의로 국가 차원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첫걸음은 시작됐다. 100만명 이상이 희생된 한국사의 치부가 영원히 역사의 미궁으로 빠져들지, 아니면 반세기 만에 진실이 밝혀질지는 일단 국회의원들 손으로 넘어갔다. ‘민간인학살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이 문제를 외면하면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있다”며 “여야는 정파를 초월해 이 법안이 조속히 통과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주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신윤동욱 기자syuk@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