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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섬세한 연기에 오묘한 매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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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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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씨네21 정진환 기자)

저렇게 깊은 그늘이 드리운 눈을 본 적이 없다. 멋들어진 우수가 아니라 상처로 단련된 동공. 저 처연한 눈으로 김호정(33)은 조용히 로카르노를 오염시켰다. 제54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 <나비>로 여우주연상을 안은 배우 김호정은 강하지만 우악스럽지 않고, 이지적이지만 오만하지 않으며, 독특하지만 유별나지 않고, 아름답지만 천박하지 않다. 잘 말린 고급 녹찻잎으로 우려낸 기품있는 차 한잔처럼 김호정은 그 나이또래 배우들 누구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제 겨우 3편의 영화를 끝낸 새내기 영화배우이지만 연극계에서는 누구나 “꼭 한번 함께 공연하고 싶어하는” 베테랑 연극배우. 동국대 연극영화과 졸업 뒤 <캣츠> <나운규> <바다의 여인> 등 꾸준히 연극무대에 올라, 히서연극상,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도 갖췄다. 우여곡절 많았던 김수용 감독의 <침향>으로 데뷔한 그의 존재를 영화계에 알린 건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 백수 남편 이성재를 쳐다보지도 않고 발로 툭툭 차는 무심한 듯 일상적인 그의 연기는 신선함을 넘어 은근한 기대로 다가왔고, 그는 세 번째 영화로 그 기대를 채워주었다.

문승욱 감독의 <나비>는 ‘망각의 바이러스’가 출몰한다는 한 도시에 찾아든 인물들의 여정을 좇아가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김호정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버리기 위해 그 도시를 방문한 독일계 한국인 ‘안나’로 출연해 건조하면서도 섬세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저 원래 되게 잘 웃어요.” 자연인 김호정은 결코 피폐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니다. 33살의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입끝이 귀에 걸리게 ‘헝헝헝’ 웃음소리를 내는 귀여운 여자. 그의 매력의 이면은 지난 8월28일부터 대학로에서 공연중인 연극 <첼로와 케찹>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손을 다쳐 더이상 연주를 계속할 수 없는 첼리스트와 동거하는 은행원으로 분하는 그는 시큼한 케첩을 듬뿍 친 햄버거를 꿀꺽꿀꺽 먹어치우고 콧소리 섞인 아양까지 떨어보인다.

10월13일, <나비>의 개봉을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의 사랑스런 모습을 당장 보고 싶은 욕구를 주체못할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혜화동행 버스를 타라.


백은하 기자/ 한겨레 씨네21부 luc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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