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하필이면 그 틀을 바꾸는 첫걸음이 자립형 사립고란 말인가? 지금과 같은 교육풍토에서는 상류층만의 입시명문 학교가 될 것이 불보듯 뻔한 학교로 교육의 다양성을 기대하는 일은 그야말로 시궁창에서 장미꽃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먼저 해야 할 것은 그 토양을 가꾸고, 바람직하고 해봄직한 교육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대안교육이다. 간디학교처럼 나름대로 뚜렷한 교육이념과 지향을 가지고 실천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실험을 꾀하고, 또 어느 정도 그 교육적 성과가 인정받은 터전을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 벌어진 일들을 보면 앞뒤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 그대로 숲은 가물고 거듭되는 산불에 타들어가는데 어디서 비싸고 먹빛나는 나무 몇 그루 사다 심는다고 숲이 살아나겠는가? 차분하게 한 구석부터 이 땅에 튼실하게 뿌리내리고 주변 토양에도 도움을 주는 그런 풀숲이 스스로 자라나게 가꾸고 돌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 교육당국은 그럴 능력이나 또는 의사가 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정책의 혼란이나 그에 따른 교육현장의 왜곡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과 아울러, 하루빨리 그 교육이라는 배의 키를 무능하고 위험한 국가주도의 공교육에서 넘겨받아 민 중심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믿음을 다지게 된다. 일찍이 우리는 현장은 아랑곳없고 양적인 수확만 바라는 부재지주와 같은 서툰 교육당국 손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작지만 기름진 참교육의 땅뙈기라도 지켜보려고 진솔한 농사꾼들과 함께 두밀리에서 작은 학교를 되찾으려는 일에 나섰다. 하지만 교육당국은 물론이고 사법당국마저 그 안이한 ‘법대로’주의에 따라 부재지주의 편을 들어주어, 그에 피땀으로 만들고 지켜온 땅뙈기마저 허망하게 빼앗긴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싸움에서 진 것은 아니다. 두밀리 한 학부모의 말처럼 우리는 “싸움을 걸 때 이미 이긴 것”이다. 그 덕에 나중에 다른 작은 학교들이 얼마나 큰 도움을 받고 살아남았는가? 체질을 바꾸고 뿌리를 갈아버리자 이제 서툰 외과수술과 같은 개혁으로 되살리기에 우리 교육은 그 병이 너무 깊다. 우리 교육의 숲은 체질을 바꾸고, 뿌리를 갈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것도 저 산불 뒤에 함부로 밖에서 나무를 들여다 마구잡이로 심는 것 같은 어리석은 짓으로는 안 된다. 한뼘씩 불타버린 땅에서 돋아나는 새싹들이 자라서 자그마한 풀숲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두밀리에서 간디까지 이어지는 튼실한 교육나무를 심고, 새로운 교육문화의 풀숲을 가꿔가야 한다. 또 이 나무와 풀숲을 지켜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번엔 그 싸움도 두팔 걷어붙이고 나설 것이 아니라, 그저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일처럼 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속되는 삶인 교육, 그것답게 해야 한다. 저 빼어난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처럼 ‘그리고 삶은 계속되고’, 하는 마음으로 그 싸움에 나서야 한다. 정유성/ 서강대 교수·교육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