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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민과 경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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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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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서 남 주냐는 속언이 아이러니하게 반증하듯이, 배워서 남 주려는 마음- 적어도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마음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다시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 사회의 ‘삶의 질’의 문제는 어디쯤에서 공회전하고 있을까.

일흔네살의 할아버지가 학처럼 긴 다리로 리듬을 타듯 사뿐사뿐 걸으며 붉은 토마토를 따고 있다. 이웃들에게 나누어줄 몫과 자신의 먹을거리로 조금. 푸른 눈의 한국인 할아버지 로이 토비아스. 나는 그를 본 적이 없다. 우연히 스친 신문기사를 통해 그를 알았고, 화려한 춤인생을 산 세계적인 무용가인 그의 고향이 미국이라는 것과 전 유니버설발레단의 예술감독이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 귀화하여 작은 시골마을에서 한국이름 이용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짧은 기사를 읽으며 나는 상상한다. 볕 좋은 어느날, 토마토를 따고 있는 백발 촌로의 등을 쓰다듬고 가는 느릿느릿한 바람과 평화로운 음악을. 인터뷰 기사의 한줄이 문득 눈에 들어온다. “차를 타고 정처없이 달리다가 기름이 바닥나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니 그곳에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다 있었다”라고.

세계적 무용가의 무욕한 생활을 보며

한국이 좋아 한국인으로 귀화한 세계적인 무용가의 무욕한 생활을 상상하는 도중에, 내 머릿속에서는 최근 우리 사회에 부쩍 붐을 이루고 있는 서방선진국으로의 이민 행렬이 지나간다. 이민을 꿈꾸고 실제 이민을 떠나는 이들의 기대는 각양각색일 것이다. 앞세대를 이루었던 이들의 이민 사유는 대개 경제적인 것이었으며 이들에게 이민생활은 생존과 개척과 고난의 문제로 직결된 장이었다. 최근 한국사회로 유입해 들어오는 제3세계 민중이 그러하듯이. 그런데 우리 세대- 작금의 풍경이 빚어내는 이민 대열은 양상이 좀 다르다. 그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 듯하다. 한국사회의 정치·문화 시스템에 절망한 이들이 다른 종류의 문화적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경우와, 이른바 ‘자녀교육’이라는 대의(?)를 위해 떠나는 것. 이 두 경우의 공통분모에는 ‘삶의 질’에 대한 다양한 욕구가 존재할 것이다.


나는 이민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다.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한 개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부려놓는 공간이 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좌우돼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인간이 구획한 국가라는 제도적 울타리는 그 안팎에서 얼마나 모순된 권력과 힘의 통치를 보여왔는가. 나는 또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구획되는 편협한 혈통의 계보를 믿지 않는다. 누가 어떤 사회로 흘러들어 그 문화에 동화되거나 다시금 흘러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지구라는 이 별의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온 이들의 시간 속에 축적된 무늬들이 그 틈새와 차이를 존중받으면서 가능한 한 오래도록, 가능한 한 아름답게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랄 뿐.

그런데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인해 이민을 고려하는 이들의 사례를 듣게 되면 나는 좀 뜨악해진다. 한국사회의 ‘과도한’ 교육열이 자원이 빈약한 이 땅의 거의 유일한 인적자원을 만들었다는 말은 일면 타당해보이지만, 그 과도한 교육열은 동시에, 더불어 함께 사는 문화보다는 지독히 경쟁적이며 타인을 밟고 올라서야 내가 산다는 이기적인 인간들을 양산하기도 한 것이다.

삶의 질과 행복의 주관적 지수를 생각한다면 한국사회의 교육열은 그야말로 ‘과도하다’. 비정상적인 학벌 위주의 제도교육이 만들어낸 현상 중 하나인 과도한 교육열과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하느니 차라리 이민을 택하겠다는 논리는 일면 수긍할 만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그 역시 과도한 교육열의 자가당착적인 이기주의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대부분이 이른바 중산층 이상의 부모들인 이들의 ‘탈한국’ 경향 속에는, 아이들에게 좀더 자유로운 교육환경과 ‘삶의 질’을 고려한 미래를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 이전에 자신의 자녀들에게 좀더 강력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자 하는 마음의 작동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식만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요컨대 이런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웬만한 좋은(?) 대학을 나와도 남보다 월등한 경쟁력을 확보하기 힘들 바에야 일찍 영어권사회에 적응해 ‘세계화’시대에 걸맞은 강력한 ‘경쟁무기’인 영어에 능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숨어 있을 터. 자기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이야 나무랄 수만은 없겠지만 나는 좀 쓸쓸해진다. 세계화 어쩌고하는 난망한 구호의 허상도 허상이거니와 아직도 공교육의 수혜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이 존재하는 이 땅에서, “내 자식만큼은 다른 자식들보다”라는 지독한 가족주의와 배타적 경쟁의식으로부터 우리는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배워서 남 주냐는 속언이 아이러니하게 반증하듯이, 배워서 남 주려는 마음- 적어도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마음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다시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 사회의 ‘삶의 질’의 문제는 어디쯤에서 공회전하고 있을까.

김선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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