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또는 칼
등록 : 2001-08-28 00:00 수정 :
8·15평양축전을 참관한 20여명의 취재기자들도 마음고생이 심한 것 같습니다. 주로 통일부를 출입하는 기자들은 방북대표단의 돌출행동에 대한 보도가 일파만파를 일으키자 고뇌하는 흔적이 역력합니다.
어느 기자는 “‘남북관계와 통일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보도하자’는 북한취재의 묵시적 가이드라인도 색깔논쟁 앞에선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고 자탄했습니다. 어느 기자는 “사안이 정치적으로 이용돼 차라리 눈과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통일부 출입기자들은 급기야 8월22일 전체회의를 열어 방북단의 돌출행동을 더 보도하는 것은 사안의 본질도 아니고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준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강정구 교수건 이외에 추가 보도를 하지 않기로 합의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한 신문이 또다시 돌출행동을 크게 보도하자 그 신문에 대해 ‘기자실 출입을 1년 정지하고 향후 10회에 걸쳐 방북취재단에서 제외한다’는 중징계를 내립니다. 참석한 기자단 전원이 이례적으로 무거운 제재에 찬성했다고 합니다.
사태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전해온 통일부 기자단의 당혹, 질책, 자성에서 현실과 보도 사이의 괴리를 읽습니다.
광풍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기자들과 방북단의 전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해보면 평양축전은 의미있고 상당한 성과도 있었습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한의 보수·진보단체가 함께 자리한 남북행사였고, 일탈행동이 있긴 했으나 대부분이 집행부의 지시를 따르면서 폭넓은 교류를 했습니다.
남북의 민간단체들은 일본 역사교과서와 독도문제에 공동대처하고, 작가·예술가들이 경의선에서 평화축제를 하고, 개천절에는 북한 단군릉에서 공동단군제를 열고, 내년 8·15행사는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치르기로 하는 등 다양한 합의를 이뤄냈습니다.
지난 90년 ‘불법적 이벤트’인 평양 범민족대회에 참석했던 작가 황석영씨는 “그때만 해도 남과 북의 통일에 대한 시각차가 너무나 커서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남북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지점에 이르렀음을 확인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방북단 일부가 약속을 어기고 돌출행동을 한 것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문에 연일 대서특필될 본령은 아닙니다. 남한사회 다양성의 표출이고, 남한사회가 결코 어느 극단에 쏠리거나 넘어갈 정도로 취약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몇몇 신문이 취재현장의 기자들을 곤혹스럽게 할 정도로 ‘오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주구속이란 특수 상황에서 극단적 자사이기주의가 발동한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곁가지 일을 침소봉대해 색깔론-인책론-DJP공조 흔들기로 파상공세를 펴는 신문지면에서, 공정한 비판의 펜이 아니라 막가파식 싸움을 벌이는 수구권력의 칼을 목도합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