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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주의 트윗- 박근혜 ‘5·16 발언, 50% 옹호’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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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7-31 18:21 수정 : 2012-09-0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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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2월 서울 상암동에 개관한 박정희 대통령 기념 도서관을 관람하고 있다. 그의 5·16 옹호 발언 논란은 길게 이어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그렇다면 일제 강점도
‘한반도 진출’로 부를까?

쿠데타를 ‘군사혁명’이라 부르는 욕망공동체, 역사를 여론으로 희석시키려는 자들

‘쿠데타’라며 나서는 얼빠진 군인들은 없다. ‘거사’에 성공한 장군은 민중에게 자신의 행동이 ‘구국의 결단’이라 방송하며, ‘불가피한 결단’을 내리게 된 국내외 상황을 비장한 톤으로 설명할 것이다. 군복 입은 자들은 민간인 몇몇을 대동하고 즉각 ‘군사혁명위원회’ 비슷한 현판을 내건다. 쿠데타를 ‘쿠데타’라고 말하면 안 되는 공포의 통치가 ‘민족번영’의 기치 아래 악몽처럼 펼쳐진다.

칠레, 버마 할 것 없는 세계 보편적 현상이다. 한국에서도 박정희건 전두환이건 상관없이 반복된 현실이다. 학자들은 이런 일을 비교·분석하려고 다름 아닌 ‘쿠데타’라는 표현을 쓴다. 군사정변 사태를 지시하는 학술적·지성적 언어다. 세계 각국 다양한 시점의 군사변란을 기술·설명하는, 해석의 방향과 상관없이 역사학이나 정치학에서 통용되는 개념어가 바로 쿠데타인 것이다. 학계에서 ‘군사혁명’은 16∼17세기 유럽 군사기술 및 전략의 획기적 변화와 그 다층적 효과를 가리키는 제한된 의미의 용어로만 쓰인다.

통념을 갖고 역사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예외주의적 선전정치가 횡행하고 있다. 역사적 실재를 이데올로기적 언어로 환치하는 프로젝트가 활성화되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과 주변 조력자들, 그리고 지지 대중의 상투적 협력 사업이다. 쿠데타를 ‘군사혁명’이라 부르고 싶은 욕망공동체. ‘군사혁명’의 코드에 따라 사회를 재규율하고픈 의식공동체가 다시 규합 중이다. 보수 기억공동체를 ‘여론’ 물리력으로 배치하려는 후보자의 후진 카드다. 자신들이 늘 혐오한다던 포퓰리즘의 전형이며, 환상적 믿음을 갖고 현행성의 역사를 말소하려는 무리의 수다.

절대 유일의 ‘역사’란 없다. 끊임없는 기억 소환과 해석 다툼, 글쓰기 생산을 통해 만들어지는 게 역사다. 그렇다고 역사를 아무렇게나 이야기해도 되는 건 아니다. 결코 유예할 수 없는 판정의 책임이 뒤따른다. 일제 식민지 점령을 ‘한반도 진출’로 기입하려는 일본 우익의 기도를 두고, 가능한 ‘역사 재평가’라 내버려둘 수 있나? 많은 일본인이 그렇게 믿으니 ‘역사에 맡겨두자’는 자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역사엔 어떤 곡변이 생기고 말 건가? 쿠데타는 ‘쿠데타’다. 음모와 불법으로 점철되고 책임과 반성이 요구되는 반란을 50% 믿음의 수로 희석시키는 수는 안 된다.

대통령 선거가 역사 인식 주체와 신화 추종자 사이의 대회전으로 빠르게 프레이밍되고 있다. 쿠데타를 과거로 확실히 정리하고 사회 진보의 길을 다지려는 의지와, 여전히 ‘군사혁명’의 구호를 고수한 채 그 ‘지도자’ 영웅의 환영을 갖고 사회 현실을 보수코자 하는 의식 사이의 ‘내전’ 상태. 결코 박정희 개인이나 과거 5·16에 제한되지 않은, 현실 정치와 미래 사회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게임이기에, 박근혜 의원이나 그 지지자는 물론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모두에게 이번 선거는 역사 평가의 운명적 사건으로 귀착된다.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박근혜가 그래서
안철수는 좋겠다

5·16 옹호 발언, 스스로 과거로 걸어 들어가… 청년들은 ‘새것’을 좋아해

박근혜 5·16 발언은 지지하는 이가 절반 정도는 되지만 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끼칠 것 같다. 민주통합당으로선 지갑을 줍는 상황이다. 민주당이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 공격하는 것만으로 박근혜에게 타격을 입히긴 어려웠을 것이다. 지난달에 엄기호가 트윗에서 한탄했듯,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서 안 된다는 말은 우리 아버지 세대에겐 더욱 박근혜를 찍어야 하는 이유가 되고 내 조카한테는 찍을지 말지를 정하는 데 눈곱만큼도 참조사항이 못 되고 있”는 것이다.

1960~70년대 태생들은 ‘젊은이들이 왜 그럴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1980년 이후 생들에겐 박정희의 독재 시기가 조선시대만큼이나 역사적 사건으로 여겨져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나 민주헌정을 파괴했다는 말에 별로 놀라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충분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너무나 멀어 보이는 사건에 대해선 오히려 심하게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히려 사태의 진실은 지금의 청년 세대가 ‘박정희 시기’를 본능적으로 먼 것으로 느끼지 않는 것에 가까울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청년들은 현 사회에서도 존재하는 그 체제의 부산물을 ‘박정희’에게만 떠넘기는 이들의 어법에 냉소하는 것일 수 있다. 민주당이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 공격하는 것이 적어도 청년 세대에겐 큰 효과를 볼 수 없는 이유는 그래서라고 본다. 사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기에 발생한 경제 문제를 박정희와 김영삼의 잘못으로만 떠넘기는 어떤 정치세력의 어법은, 거기에 일말의 진실이 있을지라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태도는 아니다. 새누리당 역시 현재의 지지부진한 경제 문제를 ‘잃어버린 10년’ 동안 우리 경제가 활력과 성장동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 말하곤 한다. 이런 얘기는 듣는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법이다.

그러나 정확한 워딩이나 의중은 어쨌든 박근혜 본인이 5·16을 옹호하고 나서자 상황은 달라졌다. 박근혜 말대로 국민 절반 이상이 그 말에 공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안은 첨예한 사안으로, 박근혜 말이 옳더라도 마찬가지로 절반에 가까운 국민은 이 발언에 극렬하게 반대한다. 게다가 이 사안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돌파해야 할 정책 사안도 아니다. 이런 문제에서 박근혜가 ‘아버지의 딸’이란 위치를 고수하고 ‘정면 돌파’의 방책을 택한 것이 청년 세대에겐 어떻게 다가올까?

아마도 박근혜 캠프는 “민주당은 ‘독재자의 딸’이란 과거에 붙들려 있고 박근혜는 미래를 바라본다”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캠프가 “한나라당은 민주당과 싸우십시오. 노무현은 21세기와 싸우겠습니다!”라고 외쳤듯이. 그러나 박근혜 발언으로 한번에 박근혜 역시 ‘과거’의 사람이 되었고, ‘새것’을 좋아하는 청춘들의 시선은 안철수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윤형
<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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