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이주의 트윗- 용산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논란

917
등록 : 2012-06-26 11:25 수정 : 2012-06-29 13:00

크게 작게

진실을 참칭하는 대신에

‘현장성’ 논란과 달리 진압 주체의 기억과 기록만으로도 그날의 실제에 다가가다

@MyoungrrangAndy

<두 개의 문>의 일란·지유 감독은 용산 참사 현장에서 1년을 함께 살면서 모든 공판에 참석해 모니터한 활동가입니다. 영화에선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곁에 있던 사람들은 압니다. <두 개의 문>은 진정한 ‘노가다’가 바탕이 된 영화입니다.


<두 개의 문>에 관해서는 타 매체 지면에서 이미 한 번 다룬 바 있다. 여기선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최근 다큐 진영 내부에서 <두 개의 문>에 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는 일부 의견이 제기된 모양이다. 요약하자면 이른바 현장성이 결여돼 있다는 주장이다.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이 다큐는 2009년 1월19일 밤부터 20일 새벽까지 서울 용산 남일당에서 벌어진 참사를 “경찰 진술과 증거 동영상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현장성이 결여돼 있다”는 주장은 연출자가 현장에 상주하며 기록해 탄생한 것이 아닌, 이미 존재하는 기록을 조립했다는 데서 출발한다(사실 두 연출자는 참사 직후부터 내내 현장에 상주했다. 다만 현장에서 기록한 관련 영상을 영화에 거의 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큐라는 장르의 본령이 과연 현장성에서 비롯되는 것인가에 관해선 고민이 필요하다. ‘진실’을 참칭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어떤 장르보다 일방적인 주관일 수밖에 없는 다큐에서, 중요한 건 ‘진실’이라는 ‘주장’의 서로 다른 얼굴들을 어떤 형식과 기준으로 선별하고 배열해 궁극적으로 그 속살을 제시해내느냐에 있다. <두 개의 문>의 선택은 오히려, 진압 주체의 기억과 기록을 열람하고 종합하는 것만으로도 그날 실제 무슨 일이 벌어졌고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너무나 명확해진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다큐 형식에서 ‘시네마베리테’와 ‘다이렉트시네마’ 사이 태도를 논쟁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현장성을 볼모로 두다니 시대착오적이다. 현장성을 다큐 장르의 DNA로 보는 건 ‘권부심’(운동권 자부심)에 비견될 만한 ‘현부심’(현장 자부심)에 가깝다. 중요한 건 계획된 ‘영화’로서의 다큐지 ‘소재’로서의 다큐가 아니다. 이에 관련한 최근 한국 다큐의 어떤 위험한 경향에 대해 나는 “어떤 소재를 다루었다는 이유만으로 만듦새에 관한 평가는 유보되고, 관객이든 언론이든 평단이든 그 다큐에 대해 발언하는 것으로 시대와 사회에 동참하고 있다 자족하는 판타지가 존재한다”고 썼었다.

정치·사회 영역의 주제를 다룬다면 더욱더, 감독은 영화 안에서 활동가가 아닌 창작자로서의 태도를 집요하게 고집해야만 한다. 다큐의 결기는 소재나 현장의 돌발 상황이 아닌 영화적 비전으로부터 먼저 제시되어야 마땅하다. <두 개의 문>은 애초 설정한 비전에 비추어 정확하게 설계되고 성취된 결과물이다. 서로 다른 입장과 주장, 기억을 <라쇼몽>의 영역에 유폐시키는 대신 그 다양한 결 안에서 감지되는 최소한의 실체를 끝내 감지해낸다. 관객의 몫으로 슬픔과 죄책감 대신 이해와 연대의 의지를 찾는다. 나는 <두 개의 문>이 어떤 식으로든 한국 다큐의 기준점이자 이정표가 되리라 희망한다.




허지웅 문화평론가




누구는 현장성이 없다고, 또 누구는 원인 제공자에 대한 분노가 없다고 비판하지만 다큐멘터리 <두개의 문>은 ‘전략’적으로 자료만으로 그날의 진실에 다가간다. 연분홍치마 제공

진실은 침묵의 순간에

용산 참사 유발한 ‘지배체제’ 냉정한 눈으로 응시해 진실에 다가서다

@kdoosik

<두 개의 문> 시사회 날 영화 시작이 10분 이상 지연되자 뒷좌석의 노인 한 분이 불쾌한 목소리로 “좌파들은 다 이런가?”라고 하셨다. 옆의 친구분은 조심스럽게 “아직 부족한 게 많지”라고 하셨다. 영화가 끝난 뒤 노인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서울 용산 참사가 있었던 자리는 지금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그 담벼락에 누군가 “여기 사람이 있었다”고 쓴 전단지를 붙여놓았다. 용산역 쇼핑몰에 무엇인가 사러 갈 때마다 나는 이곳에 꼭 들렀다. 재개발 바람이 몰아친 용산 일대가 예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그곳’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습에 대한 평가는 각양각색일 테다.

용산이라는 지리적 장소와 관계없는 사람이 용산에 대해 ‘추억’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용산 참사 때문이다. 용산 참사로 인해 용산은 이제 보편적인 장소로 전환되었다. 많은 이들은 용산 참사의 원인을 폭력 사태를 초래한 ‘주범’에게 돌린다. 경찰을 옹호하는 쪽이든, 농성자의 편을 드는 쪽이든, 여하튼 용산 참사는 특정한 원인 제공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용산 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은 이런 믿음에 균열을 낸다. 이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것은 공포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농성자도 경찰도 치솟아오르는 불기둥 속에서 망연자실 공포에 질려 있다. <두 개의 문>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이 공포를 유발한 어떤 조건이다. ‘지배자’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지배체제’를 해명하려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체제를 만들어낸 당사자들은 누구일까? 체제라는 리얼리티의 차원에 도달하면 좌우의 구분은 소멸한다. 좌파라서 이런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념으로 파악할 수 없는 리얼리티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두 개의 문>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 영화는 논쟁의 단계를 넘어 진실의 문제로 나아간다. 진실은 침묵의 순간에 등장한다.

어떤 이에게 <두 개의 문>은 너무 차가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용산 참사에 책임이 있는 ‘나쁜 놈’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 모두를 나약한 존재로 폭로해버리는 냉혹한 카메라의 눈이다. 이것을 멋있게 ‘객관의 눈’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이런 시선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드물고 낯선 것이라고 하겠다. 진실은 모든 허위를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허위가 허위인 줄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진실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의 귀환이기도 하다.

<두 개의 문>이 요청하는 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판단의 근거이면서 또한 진실을 인지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냉정한 <두 개의 문>이 우리를 울컥하게 만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