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과 종북 우파의 영원한 화수분
우파에게 탈북자·종북주의자는 자신들 우월성·존재 이유 드러내는 ‘내·외부적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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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hjongsok 나, 반북주의자지만, 이번 사안에서 임수경 옆에 선다. 이 사건의 본질은 그 외국 이름 가진 친구가 임수경한테 개긴 거다. 협박과 앵벌이를 버무리며. ‘사형’ 운운하는데 임수경이 배시시 웃어야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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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 막말은 주취 행패가 일상화한 한국에서 별 사건조차 못 된다. 하지만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임수경씨와 탈북 대학생 백요셉씨의 ‘술자리 막말 파문’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당사자들의 구도 자체가 자극적이라는 점. 한 명은 ‘통일의 꽃’이라 불리던 방북 대학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목숨 걸고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정착한 사람이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마치 극지의 자기장처럼 주변을 휘감았을 법하지 않은가.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사건이 벌어진 시점이 묘했다는 점이다.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 이른바 ‘종북’ 매카시즘이 갈수록 거세지던 때였다. 극우보수 세력이 정당민주주의 문제를 종북주의 문제로 바꿔치기하려고 광란의 말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
파문 초기 임수경 의원의 험한 발언들만 언론에 부각되자 그녀에게 비난이 집중됐다. 하지만 정황이 구체적으로 알려지고, 백요셉이라는 탈북자의 황당한 과거 발언들이 확인되자 임수경 동정론이 커졌다. 그 술자리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알려진 사실만 놓고 보면 ‘쌍방과실’이다. 백요셉씨가 임수경 의원 쪽에 접근해 던진 말들은 처음 본 사람에게 한 것치곤 확실히 무례했다. 더구나 “북조선에서 이러면 사형” 운운한 백씨의 ‘농담’은 무례를 넘어선 협박성 폭언이었다. 그에 대한 반응이라곤 하나 임수경 의원의 대응도 현명치 못했다. 특히 “탈북자 ××들이 굴러와서 대한민국 국회의원한테 개기는 거야?”라는 발언은 ‘천박한 권위주의’라는 비판을 들어 싸다.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술자리 막말 파문으로 이어지는 희비극을 보노라면 대한민국 우파가 그렇게 무식하고 부패해도 여전히 세를 유지하는 비결을 알 것 같다. 탈북자의 존재와 ‘종북주의 딱지놀이’가 여전히 작지 않은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탈북자가 백요셉씨 같진 않다. 실제로 만나보면 북한에서 생존을 위해 탈출했지만 남한의 자본주의에 대해 날카롭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이도 분명 있다.
그러나 역시 탈북자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북한이란 곳은 사람 살 데가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내보내는 존재다. 상당수 탈북자가 남한에 정착하기 위해 극우이념을 몸에 두르거나 극우세력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탈북자이기에, 즉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극렬한 우파가 된다. 우파에게 탈북자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외부적 증거’다. 그리고 이른바 ‘종북주의자’는 우파들이 계속 남한 사회의 안보와 권력을 쥐고 있어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내부적 증거’다. 혹자는 이념과 철학을 제대로 갖춘 우파가 나타나야 한다고 한탄하지만 현재로선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 같다. ‘탈북’과 ‘종북’ 없는 대한민국 우파? ‘숙주 없는 기생충’이 아닌가.
박권일 저술노동자
60대 이상 탈북자로 이뤄진 ‘기독교사회책임탈북동포회 실버합창단’이 지난 6월5일 서울 영등포 민주통합당사 앞에서 탈북 대학생에게 막말을 해 파문을 빚은 임수경 민주당 의원을 규탄하는 팻말을 든 채 <에델바이스>를 부르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기자
탈북자 주체는 없고 호명에 휘둘리는
탈북자, 민주주의 고민하고 스스로를 대표하며 더불어 살기의 민주적 실천에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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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ay_first 제가 궁금한 것은 “탈북자들의 민주주의 체화와 습득의 정도가 낮다”는 점과 “탈북자들의 발언이 과대대표된다”는 두 주장의 객관적 근거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정말 궁금해서 묻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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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담론의 러시였다. 임수경 민주통합당 의원의 대탈북자 ‘막말’과 사과가 가장 앞줄에 서 있었다. 이어 탈북자실향민중앙협의회가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을 경찰에 수사 의뢰한 사건도 생겼다. 탈북자를 대표할 자격이 없는 자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이어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과 황우여 대표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탈북단체를 홀대한다는 성명을 낸다. 타이대사관 사건에 당황한 외교통상부는 현지조사단을 파견했다. 로버트 킹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중국 내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를 들고나왔다.
보름간의 탈북자 끝말잇기 탓에 탈북자는 사회 무대 위로 올랐고, 그들의 목소리가 대중의 귓불을 스치기 시작했다. 국내 체류 탈북자가 2만4천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 탈북자 관련 비정부기구(NGO)가 도처에 있으나 여전히 불평등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진다. 남쪽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3국으로 이주를 꿈꾸는 이가 많음도 알게 되었다. 호사를 누리는 탈북자도 있고, 탈북자 루트가 있으며, 외교 마찰까지 빚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비로소 대중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보름의 풍성한 탈북자 정보는 투명인간을 보이게 했고, 그들 존재에 이러저러한 말을 보태는 사건을 만들어냈다.
지난 보름이라는 국면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지난 보름간 이어진 탈북자 국면은 임수경 의원에 분노하고 홀대에 항의하는 탈북자들의 적극적 노력이 만든 결과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을 대의하고 활용하는 쪽의 노력 탓이 더 컸다. 외교부가 격분해서 나서고, 새누리당이 거당적으로 들고일어서고, 미국이 중국 내 인권 문제를 들고 나서고, 보수언론이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등의 회오리 효과가 있었다. 종북 담론이 시들해지기 전에 탈북 담론이 이어졌고, 그게 지난 보름 동안 우리 앞에 다가온 담론 러시였다. 그런 점에서 탈북자 담론은 특정 블록이 형성한 정치적 사건이었던 셈이다.
탈북자들은 참으로 많은 이름으로 호명되고 있었다.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탈북자란 공식적 호명 외에도 보호 대상으로, 때론 국제적 난민으로 불리기도 한다. 스스로를 명명하지 못하고 늘 외부로부터 그렇게 불리며 대의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민주주의가 충만한 곳으로 왔다고 말하지만 정작 민주주의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대상화·객체화되고 있었다. 스스로 이름짓지 못하고 남이 붙여준 이름으로만 살고 있었다. 그것도 가장 자신들의 처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주체의 호명에 대답하며 살고 있었다.
보수세력에 의해 대의된다는 이유만으로 탈북자를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민주주의 사회를 운위했던 탈북자들의 말대로 민주주의를 고민해보는 것을 미뤄서는 안 될 일이다. 자신들이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들 스스로를 대표할 준비, 자신들 안 차이를 확인하는 일, 같은 공간 내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일. 그런 일들이 곧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이다. 지난 보름 동안 넘치는 탈북자 담론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사안이었으면도 고스란히 생략된 이야기들이었다.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비민주적 담론이 만개한 지난 보름은 탈북자를 제대로 고민하기엔 참담한 시기였다.
원용진 서강대 교수·커뮤니케이션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