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 맞은편 화교회관이 들어설 뻔했던 자리에 두 폭 병풍 모양으로 우뚝 솟은 플라자호텔과 그 뒤의 한화빌딩이 보인다. 플라자호텔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서울시청에서 소공동 화교 집단 거주지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 도시계획적 기획은 대체로 성공해 이제 이 호텔 뒤편에서 재한 화교가 겪은 비운의 역사를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전우용 제공
1966년 10월 말,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방한했다. 베트남전쟁 참전 7개국 순방의 일환이었다. 한국에 오기까지, 그는 도처에서 베트남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대중에게서 ‘양키 고 홈’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환대였다. 김포공항에서 서울에 이르는 연도 전체가 열광적으로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마음에도 흥분과 감격이 차올랐다. 그는 환영객들에게 답례하느라 서둘러 공식 환영식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시청 앞 광장에서 그를 기다리다 무료해진 외신 카메라 기자들이 카메라 방향을 시청 맞은편 중국인의 ‘화석 건물’들 쪽으로 돌렸다. 낡고 초라하며 무질서하게 늘어선 건물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오롯이 담겨 미국의 TV 화면으로 송출됐다. 서울시청 맞은편 화교회관이 들어설 뻔했던 자리에 두 폭 병풍 모양으로 우뚝 솟은 플라자호텔과 그 뒤의 한화빌딩이 보인다. 플라자호텔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서울시청에서 소공동 화교 집단 거주지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 도시계획적 기획은 대체로 성공해 이제 이 호텔 뒤편에서 재한 화교가 겪은 비운의 역사를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포성이 멎은 지 10년 만에 다른 나라에 군대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한 고국이 자랑스러워 힘이 들어갔던 재미동포들의 어깨에서 다시 힘이 빠졌다. 재미동포들은 나라의 얼굴인 시청 앞 광장 주변을 ‘정비’해달라고 여러 경로를 통해 청와대에 하소연했다. 이를 계기로 서울시 주도하에 소공동 일대 재개발 사업이 시작됐다. 서울시는 화교들이 땅을 내놓으면 그 땅을 합친 뒤 그 위에 화교회관을 지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집을 고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던 화교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대만의 국민당 정부도 보조금을 보내왔다. 1971년 가을, 시청 맞은편에 있던 화석 건물들이 헐렸다. 그러나 이듬해까지 완공하겠다던 화교회관은 몇 년이 흐르도록 착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건물에서 영업하며 화교회관에 입주할 날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화교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무렵, 한국화약이 그들의 땅을 사들이겠다고 제의했다. 화교들은 몇 대에 걸쳐 일궈온 생활의 터전, 고향을 버리면서까지 지켜온 삶의 근거를 내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시청 맞은편에 두 폭 병풍 모양의 플라자호텔이 착공돼 이듬해 문을 열었다. 더불어 90년 넘는 긴 세월 동안 소공동 일대에 쌓인 중국인들의 자취도 병풍 뒤편, 서울 시민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중국인들 향한 차별, 이주노동자에게로 이때를 전후해 재한 화교의 상당수가 대만이나 제3국으로 떠났다. 그들은 대부분 한국이 고향이었다. 그들에게는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제3국뿐 아니라 대만도 ‘타국’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그들이 자기 이웃에 뿌리내리고 살게 놓아두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백인에게는 관대했으나 중국인에게는 각박했다. 재한 외국인 중 화교의 비중이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줄어든 지금, 한국인들의 ‘각박함’은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 출신의 이주노동자에게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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