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서소문동 큰길. 서소문(소의문)은 1914년 철거됐고, 길가에는 번듯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지금의 서울시청 서소문 별관 주변과 맞은쪽 일대에는 미로처럼 얽힌 골목 안에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밀매음굴과 아편굴이 숱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전우용 제공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재조선 중국인은 ‘적국민’이 되었다. 조선을 찾는 쿨리의 발길이 끊겼고, 서소문동에 몰려 살던 중국인들 중에도 되돌아간 사람이 많았다. 덕분에(?) 지저분한 중국인은 줄었으나 대신 감시받는 중국인이 늘었다. 일본 경찰에게서 ‘안전성’을 인정받은 중국인들만이, 중국 내 일본군 점령 지역을 오가며 무역에 종사할 수 있었다. 전쟁 물자 전반의 수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상황에서, 중국인 무역업자들이 취급할 수 있는 물건은 제한돼 있었다. 비단이 대표 품목이었지만 그조차 한때였다. 1940년대 이후 전 국민의 군사화가 강행되는 상황에서 비단옷을 입고 돌아다닌다는 건 스스로 ‘비(非)국민’임을 인증하는 행위였다. 1938년 봄,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가수 김정구가 <왕서방 연서>라는 신곡을 발표했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퉁퉁 털어서 다 줬소/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서도 띵호와/ 명월이 하고 살아서 왕서방 기분이 좋구나/ 우리가 반해서 하하하 비단이 팔아도 띵호와” 그는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 이를 까맣게 칠하고 입으로 헛바람 소리를 냈다. 이 빠진 중국인 흉내를 낸 것이다. 이 노래는 곧바로 서울 장안을 휩쓸었다. 거의 모든 중국 남성이 ‘왕서방’이라는 새 별명을 얻었고, 중국인들은 어떤 멸시와 모욕을 받아도, 어떤 사기를 당해도 ‘띵호아’(頂好·너무 좋아)라고 대답해야 하는 사람처럼 되었다. 중국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는 이런 조롱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조선인들과 어울릴 때는 ‘자진해서’ 이 노래를 ‘조선인이 흉내 내는 중국인식 조선 발음’으로 불러야 했다. 1930년의 서소문동 큰길. 서소문(소의문)은 1914년 철거됐고, 길가에는 번듯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지금의 서울시청 서소문 별관 주변과 맞은쪽 일대에는 미로처럼 얽힌 골목 안에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밀매음굴과 아편굴이 숱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이 동네에서 수시로 마약사범과 밀매음녀를 단속했지만, 마약 취급권을 둘러싼 중국인 폭력조직 사이의 싸움이 살인으로 번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 무렵 조선인들에게, 서소문정은 서울의 할렘이었다. 일본인, 공공연히 거론할 수 없는 ‘성역’ 물론 석유 장수 ‘나카무라상’이나 광목 장수 ‘고바야시상’은 조롱은커녕 풍자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직설적으로든 은유적으로든, 조선인이 공공연히 거론할 수 없는 ‘성역’에 있었다.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 ‘일본인-조선인-중국인’으로 이어지는 삼분법적 서열 의식이 견고히 자리잡았다. 그 삼분법에 따르면, 일본 민족은 조선 민족보다 우월하기에 그들에게 지배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적대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배워야 할 상대다. 반면 중국 민족은 조선 민족보다 저열하기에 멸시·조롱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인류 사회의 병균과 같은 존재다. 역시 당연히, 이런 의식은 민족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조선인들은 자민족의 생존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사람들을 구박함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환상 속에서 해결하는 버릇을 들였다. 또 한 번 당연히, 이는 일본인들이 매우 기꺼워하는 바였다.
역사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