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8일 파업 100일째를 맞은 문화방송 노조원들이 서울 여의도에서 시청자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고 김재철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100배를 하고 있다. 이런 ‘절’이 싫어서 그들은 떠났을까. 김명진 기자
주님의 뜻대로? 당신의 맘대로!
‘기도에서 방송 복귀 응답’ 운운한 이의 혹시 모를 신성모독을 걱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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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good종교적 계시 때문에 복귀했다는 문화방송 양승은·최대현 아나운서. 차라리 힘들어서 복귀했다고 하지. 신을 동료들까지 배신하라고 계시까지 내리는 삼류 싸구려로 만들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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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의 ‘신심’(信心)에는 정말 미안하지만, 그것은 단연코 내가 올해 들은 얘기 가운데 가장 재밌었다. 얼마나 재밌었느냐면 그 얘기를 처음 듣는 순간 근육이 통제되지 않아 순간적으로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돌이켜보니, 내 생애 그런 순간은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절규하며 내면의 콧소리를 분출하던 ‘맹구’를 처음 봤을 때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선배, 문화방송 아나운서 2명이 파업을 접고 직장으로 복귀한다고 하네요.”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아니 반드시 오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그 순간이 오는구나 싶었다. 긴 병엔 효자 없다. 문화방송 파업이 100일에 육박하며, 언젠가부터 이 파업이 산산이 부서진 이름은커녕 겨울밤 곶감 빼먹듯이 대오만 산산이 부서지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닐까 늘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정말, 그 순간이 온 것이다.
“그래, 이유가 뭐래?” 편집장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문화방송을 출입하는 동료 기자의 대답에 약간의 정적, 순간적인 망설임이 감지됐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사장의 사람이 되겠다는걸.’ “선배, 그게… 그 아나운서가 주말에 기도를 올렸는데, 하느님이 방송에 복귀하라는 응답을 주셔서…” 말끝이 흐려졌다. 남보다 빨리 사실을 알아온 기자의 보고엔 이례적인 멋쩍음이 묻어 있었다.
그 아나운서의 이름을 따로 밝히진 않겠다. 그는 이후 ‘영접’인지 ‘호의’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대단한 회사의 환대를 받으며 화려하게 모든 아나운서가 선망해 마지않는 프로그램을 맡게 됐다. 이쯤 되면 가히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도 한국에선 다큐멘터리 장르라고 해야 할 판이다. 한 아나운서의 간절한 응답을 들으신 하늘이 그에게 메인 자리를 내려주시니, 이 묵시록이야말로 ‘공영방송이고 뭐고 난 스펙 좋아 입사한 것뿐인데’ 파업을 하고 싶지 않은 모든 박해받은 자에게 하늘이 내리는 가장 극렬한 위로이자 격려가 아니라 할 수 없고, ‘신의 직장’의 영속과 안락한 회사원 생활의 영위에 한 줄기 빛이 아니겠는가 싶다. 그 아나운서는 분명, 훗날 한국 기독교사의 가장 빛나는 간증인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파업이 길어지면 당연히 지치고 힘들어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그 나약함이야말로 생활인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존재감이고, 왜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며 사는 자들을 세상이 용기 있다고 하는지 확인시키는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공영방송 사수’의 슬로건을 내걸고 파업에 임하던 자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건만 단지 어느 순간 하늘의 계시를 받고 원래 자리보다 더 빛나는 자리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마음으로 이해하거나 믿을 수 없는 무당파이다. 그래서 나는 다만 이 일대의 간증 이후 한국 기독교가 짊어져야 할 어떤 악영향이 그저 사회적으로 우려스러울 뿐이다. 그가 받은 계시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에 입각한 것이었을까? 그가 혹시 하늘의 뜻을 팔아 일신의 영달을 좇으려 한 것이라면, 그건 정말 그의 그 님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기는 행위가 아니겠느냐 말이다.
김완 <미디어스> 기자
배후는 주님이 아니라 사장님
아나운서 향한 손가락질보다 김재철 사장의 신종 통치술 깨뜨릴 행동 시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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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show @cbsshow ‘정세진의 의자 vs 양승은의 주말 의자’를 보며 히브리서를 묵상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11:2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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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은씨의 문화방송 노조 탈퇴와 앵커 승진은 확실히 스캔들이다. 화려한 변신이다. 파업에 대응하는 사 쪽의 꼼수를 반영한다. 제작 인력의 공백을 채우고 파업 대오를 흩뜨려놓으려는 이중의 노림수다. <일밤-나는 가수다>에 복귀한 김영희 PD나, 월급은 물론이고 현지 체재비까지 끊길 상태에서 다시 마이크를 잡은 특파원들의 사례와 구별되는, 예측 불가 김재철 사장의 신종 통치술이 또 한 개 나왔다. 즉효가 나타났다. 누군가는 그 개인기를 ‘신의 계시’로 읽었다. 어처구니없는, 그렇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닌 일이 벌어진 셈이다.
네티즌들의 분개는 당연하다. 파업 중인 노조나 연대하는 다른 방송노동자들도 사 쪽의 추가 공작, 유사 행태를 경계하는 게 맞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다. 더 이상 그녀를 두고 ‘배신’이니 욕하지 말자. 대단치 않은 아나운서의 파업 이탈과 노조 탈퇴 때의 발언에 대해 욕설을 퍼붓는 것은, 한마디로 시간 낭비고 하나 마나 한 짓이다. 그런 시비로 지금 당장의 현실 그 어떤 것도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신의 계시’ 어쩌고 한 아나운서가 아니다. 그녀를 그렇게 방언하게 만든 들뜸의 간계, 그 배후 음모적 권력이 여전히 문제의 본질이다. 추궁 대상이다.
양씨에 대한 말뿐인 비난이나 험담이 아닌, 사장과 배후 권력을 향한 조직적 분노와 적대적 행동이 여전히 다급한 것이다. 100일 넘게 파업 중인 문화방송 내부 노동자들의 처지에서도 그렇다. 어이없고 민망한 일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개념 상실의 작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파업의 분위기를 해치거나 투쟁 대세에 지장을 줄 일은 아니니 안심하란다. 글을 쓰기 직전 서울 여의도광장 희망텐트 농성 현장에서 만난 노조위원장의 표정에서도 그녀가 가담한 환상적 모사의 그 어떤 파장을 읽어내기 힘들다. 변함없는 태도다. 신뢰 가는 자세다.
개인적으로 평생 다시 안 올 운명적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게다. 진짜 우주적 계시를 따른 신자의 처신이었더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천상을 헤매면 된다. 지상의 우리에게는 ‘낙하산 사장’ 퇴출을 위한 파업의 과제, 이들과 연대해 공영방송을 복구할 현실의 역사가 한 치 변함없이 실재한다. 그러하니 떠난 그녀를 향한 유감을 접고, 남은 현실의 문제풀이에 실천적 공력을 모아야 한다. 파업에서 승리해야 양씨 같은 희비극적 존재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 아니겠나. 결국 파업은 기회주의 권력에 맞서 인간에 대한 예의, 노동자로서의 자존을 지키는 핵심 공사가 된다.
말단의 양씨에 대해 키보드로 열변하는 것으로는 사장이 교체되거나 방송이 해방되는 미래가 오지 않는다. 뜨거운 관심과 비판적 의식, 열정적 행동을 파업 중인 노동자, 투쟁 중인 해고자들에게 돌려야 한다. 여의도가 아니어도 좋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연쇄자살, 삼성반도체 출신 노동자들의 반복되는 죽음이 또 다른 막중한 현실이다. 그 야만적 연쇄를 깨트리기 위해, 가벼운 한 아나운서의 처신을 향한 마찬가지로 가벼운 손가락질을 접자. 대신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선한 동심, 강한 일체가 되어보기. 저 위 신의 계시가 아닌, 바로 지금 현실의 주문이다. 훨씬 힘든 사업이다.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