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장애인들이나 유아·아동에 대한 성폭력과 학대에 대해 만약 폴란 데비 같은 여성이 이 사회에 존재했다면 그는 과연 어떤 복수극을 준비했을까.
한 유치원 교사와 유아들에 대한 성교육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자기 의사표현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결론적으로 강조하게 되는 것은 “이건 싫어요! 하지 않겠어요!”라고 분명한 의사표현을 하도록 교육하는 것이란다. 상대방(어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거부의 의사를 분명히 밝혀라. 그러면 가해하려고 하던 어른들은 손쉽게 폭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약자의 눈망울 앞에서 일단 주춤하게 된다는 것. 자신의 범죄행위에 도덕적인 제동을 걸 확률이 높아질 가능성에 호소하라는 이야기이다.
<밴디트 퀸>을 보면서 불편했던 것
이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착잡해진다. 성은,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이 자기 생명의 에너지를 발현해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즐거운 행위, 자유롭고 충만한 가운데 생명의 연대를 확인하는 아름다운 교감의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의 성교육은 왜 이토록 방어적이고 수동적이며 위험한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필사의 것이 되고 말았는지. 사실 성은 교육받고 교육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성교육’이라는 말의 출현 자체가 이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 또한, “싫어요!”라고 의사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봉쇄되어 있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단지 신체적 약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문화·경제적인― 제도적 약자이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는 온갖 폭력들! 한 여자를 떠올린다. 극빈한 천민계급으로 태어나 열한살에 소 한 마리와 자전거 한대에 팔려간 여자. 남편의 성적 학대와 구타를 견디다 못해 가출했다가 경찰과 결탁한 갱단에 납치되어 열아홉살에 무자비한 윤간을 당한 여자. 처절한 현실 속에서 산적떼를 이끌면서 부자를 털어 빈자를 도왔고 억압받는 약자의 편― 특히나 천민 여자의 편에 있었던 여자 두목.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들을 찾아내어 살해하고, 1981년에는 상류층 남자 22명을 카빈 소총으로 난사해 공개처형한 여자가 있었다. 풀란 데비.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영화 <밴디트 퀸>을 통해서다. 이십대 중반의 비 내리던 어느날 <밴디트 퀸>을 보면서 고통스럽고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들에 흔히 있을 법한 대리만족적인 카타르시스가 그 영화엔 없었다. 지독한 가부장적 사회의 가난한 천민 소녀에게 가해지는 야만적인 힘과 공포와 절규. 그 외연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나를 그토록 불편하게 한 것은, 스크린 속의 무참한 일상이 어딘지 낯익다는 ‘익숙함’ 때문이었으며 저 끔찍한 현실이 우리 사회 속에서도 역시 ‘진행중’이라는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낭만적인 눈으로 인도를 동경하고 있던 당시의 나에게는, 백일몽 중 쏟아진 물벼락 같은 것이었다. 많은 3세계 국가들이 그렇듯이 인도 역시 유전하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 타자화된 약자들의 공포와 분노, 야만적 권력의 음험함이 뒤범벅되어 있는 나라였다. 물론 인도는 독특한 방식의 영성을 간직한 땅이다. 그러나 어떤 영성과 신비도 현실이라는 거죽을 뚫고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현실의 거죽을 깍지끼지 못했을 때 절대로 중심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그 영화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얼마 전 그 ‘밴디트 퀸’이 피살당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데비는 11년을 감옥에서 복역한 뒤 96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억눌린 자와 여성을 대변하는’ 사회운동가로 살았다. 출감 뒤 데비의 사회활동은 내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데비와 같은 전력(?)을 가진 여자가 사회활동을, 그것도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한국사회에도 있을까라는 것과, 데비를 살해한 것이 개별적인 ‘누구의 손’이 아니라 강자의 문법을 가진 어떤 ‘거대한 손’이며 그 손은 우리 사회에도 똑같이 작동하고 있다, 라는 것이다. 세습된 힘의 노예들 우리나라의 ‘2000년 범죄시계’에 따르면 지난 한해 전국적으로 1시간17분에 한번씩 성폭행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유아, 아동에 대한 성폭력과 학대, 가정 내 폭력, 매맞는 여자들도 도대체 줄어들 줄 모르며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무서운 것은,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병인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병인이 있다면, 사회적 약자를 유린함으로써 정복의 쾌를 찾을 수밖에 없는 세습된 힘의 노예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 노예들이 여전히 양산되는 배후에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유린이 관습적으로 묵인되곤 하는 사회의 불감증이 있을 것이다. 인권의 사각지대 속에서 다시 한번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여성장애인들이나 유아·아동에 대한 성폭력과 학대에 대해 만약 풀란 데비 같은 여성이 이 사회에 존재했다면 그는 과연 어떤 복수극을 준비했을까. 김선우/ 시인

사진/ 김선우 시인
이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착잡해진다. 성은,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이 자기 생명의 에너지를 발현해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즐거운 행위, 자유롭고 충만한 가운데 생명의 연대를 확인하는 아름다운 교감의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의 성교육은 왜 이토록 방어적이고 수동적이며 위험한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필사의 것이 되고 말았는지. 사실 성은 교육받고 교육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성교육’이라는 말의 출현 자체가 이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 또한, “싫어요!”라고 의사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봉쇄되어 있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단지 신체적 약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문화·경제적인― 제도적 약자이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는 온갖 폭력들! 한 여자를 떠올린다. 극빈한 천민계급으로 태어나 열한살에 소 한 마리와 자전거 한대에 팔려간 여자. 남편의 성적 학대와 구타를 견디다 못해 가출했다가 경찰과 결탁한 갱단에 납치되어 열아홉살에 무자비한 윤간을 당한 여자. 처절한 현실 속에서 산적떼를 이끌면서 부자를 털어 빈자를 도왔고 억압받는 약자의 편― 특히나 천민 여자의 편에 있었던 여자 두목.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들을 찾아내어 살해하고, 1981년에는 상류층 남자 22명을 카빈 소총으로 난사해 공개처형한 여자가 있었다. 풀란 데비.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영화 <밴디트 퀸>을 통해서다. 이십대 중반의 비 내리던 어느날 <밴디트 퀸>을 보면서 고통스럽고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들에 흔히 있을 법한 대리만족적인 카타르시스가 그 영화엔 없었다. 지독한 가부장적 사회의 가난한 천민 소녀에게 가해지는 야만적인 힘과 공포와 절규. 그 외연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나를 그토록 불편하게 한 것은, 스크린 속의 무참한 일상이 어딘지 낯익다는 ‘익숙함’ 때문이었으며 저 끔찍한 현실이 우리 사회 속에서도 역시 ‘진행중’이라는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낭만적인 눈으로 인도를 동경하고 있던 당시의 나에게는, 백일몽 중 쏟아진 물벼락 같은 것이었다. 많은 3세계 국가들이 그렇듯이 인도 역시 유전하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 타자화된 약자들의 공포와 분노, 야만적 권력의 음험함이 뒤범벅되어 있는 나라였다. 물론 인도는 독특한 방식의 영성을 간직한 땅이다. 그러나 어떤 영성과 신비도 현실이라는 거죽을 뚫고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현실의 거죽을 깍지끼지 못했을 때 절대로 중심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그 영화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얼마 전 그 ‘밴디트 퀸’이 피살당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데비는 11년을 감옥에서 복역한 뒤 96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억눌린 자와 여성을 대변하는’ 사회운동가로 살았다. 출감 뒤 데비의 사회활동은 내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데비와 같은 전력(?)을 가진 여자가 사회활동을, 그것도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한국사회에도 있을까라는 것과, 데비를 살해한 것이 개별적인 ‘누구의 손’이 아니라 강자의 문법을 가진 어떤 ‘거대한 손’이며 그 손은 우리 사회에도 똑같이 작동하고 있다, 라는 것이다. 세습된 힘의 노예들 우리나라의 ‘2000년 범죄시계’에 따르면 지난 한해 전국적으로 1시간17분에 한번씩 성폭행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유아, 아동에 대한 성폭력과 학대, 가정 내 폭력, 매맞는 여자들도 도대체 줄어들 줄 모르며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무서운 것은,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병인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병인이 있다면, 사회적 약자를 유린함으로써 정복의 쾌를 찾을 수밖에 없는 세습된 힘의 노예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 노예들이 여전히 양산되는 배후에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유린이 관습적으로 묵인되곤 하는 사회의 불감증이 있을 것이다. 인권의 사각지대 속에서 다시 한번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여성장애인들이나 유아·아동에 대한 성폭력과 학대에 대해 만약 풀란 데비 같은 여성이 이 사회에 존재했다면 그는 과연 어떤 복수극을 준비했을까. 김선우/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