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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우리 안의 복거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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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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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TV에서 본 조기영어교육 교재 광고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엄마가 사과를 보여주자 아기는 “사과”라고 말한다. 엄마는 “노, 노, 노우, 애플” 하고 머리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얼마 뒤 영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아기는 잠자리에 들면서 엄마에게 “굿 나잇 맘” 하고 말한다. 엄마는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영어과열화시대를 사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사과를 사과라 부르지 못하고,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하는 시대’,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화시대의 현실이다. 이 광고의 후속편이었던가, 중전이 세자를 보고 “세자, 영어공부가 몇달째인데 아직도 입조차 열리지 않사옵니까”라고 하자 벽안의 신하가 “귀부터 열어주십시오” 하고 아뢴다. 한 나라의 세자가 영어를 못하는 것이 조정의 미래가 달린 중대한 일이라는 건지, 귀가 막혀 영어를 못 듣는 것이 기막힌 일이라는 건지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영어를 쓰면 세계적 도시가 된다?

몇해 전 복거일의 책 <국제화시대의 민족어>로부터 시작된 영어공용화론 역시 이런 세태를 반영하고 있는 주장이다. 복거일의 주장은 대충 다음과 같다. “세계화로 인한 지구제국의 출현으로 세계어가 된 영어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영어에 아무리 투자를 해도 필요한 영어능력을 터득하기 힘들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일차적으로는 공용어로, 궁극적으로는 모국어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적 감정 때문에 영어의 공용화가 쉽지 않기에 거친 민족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민족어인 한국어는 다른 민족어와 함께 장차 ‘박물관 언어’가 될 것이지만 전문가들이 연구, 보존하면 된다.”

복거일의 주장은 너무나 가당찮은 주장이기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구제국이 출현’하니까 독수리 오형제가 떠오르는 건 만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겠지만, 일단 세계화의 종착점이 지구제국 출현이라는 것 자체가 만화영화 같은 비현실적인 예견이며, 영어를 잘해야 세계화가 이루어진다는 논리는 더더욱 극단적이다. 게다가 영어공용화를 반대하는 자연스런 태도를 ‘거친 민족주의’라고 몰아세우는 데는 아예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복거일씨만 욕할 수는 없다. 조기영어교육시킨다고 애들을 다그치는 엄마들, 영어교육 강화에 혈안이 되어 있는 교육정책 입안자들, 영어능력만 보고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기업들, 영어강의 비율만 늘리면 세계적인 대학이 된다고 생각하는 대학당국자들, 사실 이들 모두가 조금씩은 복거일이기 때문이다. 복거일은 오히려 욕먹을 각오하고 그들의 생각을 과감하게 드러낸 용기있는 지식인인지도 모른다. 정부당국부터가 제주도 영어공용화정책을 구상하고 있다지 않은가. 제주도를 관광특구로 지정해 영어공용화를 하면 관광수입도 늘어나고 세계적인 도시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복거일의 논리보다 더 터무니없다. 제주도민은 그 좋은 우리말 팽개치고 영어나부랭이로 관광수입이나 올리라는 건지, 제주도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요즘 대학교수 채용에도 ‘영어로 강의 가능한 자’를 조건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고, 지방의 몇몇 대학에서도 영어강의를 계속 늘리고 있다. 어떤 대학은 토플성적을 졸업요건으로 정해놓고 점수가 안 되면 학점을 채워도 졸업을 안 시킨다. 이렇게 국가와 교육당국, 학부모와 학생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쳐 ‘영어 잘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정작 우리말, 우리글이 박대당하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다. 대학생들의 답안지를 채점하다보면 맞춤법이 엉망인 것은 차라리 양반이고,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국적불명의 문장들을 무수히 접하게 된다. 세계화와 영어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교수들에게는 우리말의 중요성에 대해 한번이라고 생각해봤는지 반문하고 싶다. 영어가 중요하다면 우리말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자기나라 말에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외국어만 잘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된 교육이 아니다. 대학졸업을 위해 토플점수 몇점을 요구해야 한다면, 그 이상의 한글 글쓰기 능력을 요구해야만 한다.

프랏스와 중국에서 얻는 교훈

이제는 거리의 간판에서조차 한글 상호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노태우 정부가 “국군의 날도 공휴일에서 제외시켰으니 한글날도 제외시킨다”며 한글날을 국경일에서 제외한 것은 정부당국이 우리 민족어를 얼마나 홀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조치였다. 많은 국어학자, 문화예술인의 건의에도 아직도 한글날은 국경일로 부활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영어 침투에 대응하기 위해 모국어가 존재하는데도 공공문서에서 외국어를 사용하면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소위 ‘모국어사용의무화 법안’까지 통과시켰고, 중국 정부는 공식 코뮈니케에서 이제까지는 영어와 중국어로 언론자료를 제공해오다가 몇해 전부터는 중국어 전용 서비스만 제공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자발적으로 한글을 버리고 영어를 공용어로 택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중복, 말복의 무더위에 복씨가 주장한 영어공용화론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복장이 터질 정도로 답답하기만 하다.

최연구/ 국제관계학박사·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대우강사

http://www.postech.ac.kr/~choi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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