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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30m 철탑에 올랐던 마음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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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7-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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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 고공농성의 주인공 ‘철도노조 교육2국장’ 이종선씨의 끝나지 않은 싸움

지하철을 타고 인천에서 서울 방향으로 가다가 용산역 구내에 들어섰을 때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높이 30m의 철탑이 보인다. 평소에도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허름한 철탑이다. 2000년 여름, 그 철탑 위에 두 사람의 철도 노동자가 올라가 정확하게 40일을 버티고 내려왔다. 철도노동조합의 민주화와 회사의 부당한 징계에 항의하기 위해 이종선씨와 김병구씨가 행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사진/ "철도가 죽으면 우리 모두가 죽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해고노동자 신분이다.(박승화 기자)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남다른 결단을 내릴 수 있고, 죽음의 바로 코앞까지 가보는 격렬한 행동을 몸소 실천할 수 있었던 인간은 뭔가 특별히 다르게 생겼을 거라고 짐작한다. 영화에서도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격앙된 표정으로 연기하게 마련이어서, 재패니메이션 <인랑>(人狼)에 나오는 도시 게릴라들은 모두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얼굴로 그려져 있다. 나도 그런 선입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약속장소인 백운역광장 건너편 편의점까지 걸어가면서 내가 막연히 상상한 이종선(34)씨의 얼굴은 <인랑>의 도시게릴라 정도는 아닐지라도 굳센 의지가 느껴지는 적당히 강인한 인상이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어? 동자승처럼 생겼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둥글넓적한 얼굴의 마음씨 착해 보이는 아저씨가 비 내리는 밤 거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철탑 위에 올라가 40일 동안의 이른바 고공농성이란 걸 벌일 수 있었을까….”

<인랑>의 도시게릴라? 동자승?


마을버스에서 내려 함께 집으로 걸어 들어가며 물어보았다.

“오늘 며칠 만에 집에 들어가시는 건가요?”

이종선씨는 그제에서야 날짜를 잠시 헤아려보다가 말했다.

“4일 만이군요.”

집에 들어서자 세살짜리 딸 보배가 “아빠, 아빠, 아빠, 아빠…”를 계속 부르며 따라다닌다. 며칠 만에 아빠를 보는 반가움에 다른 말은 미처 할 틈이 없다.

이종선씨의 아내 박상초(31)씨는 “며칠 더 있다가 올 줄 알았다”면서 예사롭게 맞더니 얼른 주방에 가서 저녁을 준비한다. ‘노동자통일대’라는 노동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만난 부부는 역시 다르다. 이종선씨가 활동했던 철도노조의 ‘전면적직선제쟁취를위한공동투쟁본부’나 ‘민주철노건설과철도민영화저지를위한공동투쟁본부’ 등의 활동에 대해서 얘기하는 동안, 이종선씨보다 부인 박상초씨가 날짜들을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종선씨는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성장해 철도 노동자가 되었다. “보기 드문 인천 토박이”라고 스스로를 표현했다. 대학을 다닐 때는 동아리연합회의 사무국장도 했었다니까 그 활동력을 충분히 짐작할 만한데도 그는 “열심히 활동하는 후배들을 도와주었을 뿐”이었다고 자신을 낮춘다.

1993년, “대한민국 운동권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라고 흔히 표현되는 때였다. “인류 최고의 과학적 이데올로기로 70년 동안 무장했었다”고 스스로 자랑하던 소비에트가 하루아침에 해체되었고,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는 몰락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진보세력이 92년 대통령선거에서 ‘처절하게’ 패배했을 때였다.

부인도 흔쾌히 동의를 했으나…

사진/ 노동단체에서 활동하다 만난 부인 박상초씨는 듬직한 '동지'이다.(하종강)

후배들과 얘기하던 이종선씨가 ‘한때 각오했던 삶’을 포기하겠다는 한 후배에게 “왜 그만두냐?”고 가볍게 힐난을 했는데, 그 후배가 한 말이 이종선씨의 가슴을 쳤다.

“형은 안 하면서, 왜 우리한테 그래?”

이종선씨는 그때 답했다.

“나도 할 테니까, 너희들도 해.”

그날 이후 이종선씨의 삶은 후배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학을 중퇴하고 철도 검수원이 된 뒤, 이종선씨는 중요한 고비마다 후배들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나도 함께 저녁자리에 끼어 밥을 먹으며 부인인 박상초씨에게 물었다. “남편이 철탑에 올라갔다는 얘기 처음 들었을 때 마음이 어땠어요?”

“집에 미리 얘기하고 올라갔어요. 저도 알고 있었어요.”

어라, 내가 알기에 그런 경우란 거의 없다. 보통은 잠자는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몇번씩이나 살펴본 남편이 “나는 가오”라고 쓴 쪽지 한장 남겨놓고 새벽에 몰래 집을 빠져 나온다.

“그때 말리지 않았어요?”

박상초씨가 단호하게 답한다.

“우리 집은 뭘 하겠다고 했을 때 말리고 그러는 구조가 아니에요.”

세속적 사고방식으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부인의 대답을 나는 계속 물고늘어졌다.

“그래도 남편이 철탑에 올라가서 ‘고공농성’을 한다는데,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었어요?”

박상초씨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답했다.

“저는 그렇게 높은 곳인 줄 몰랐어요. 어디 올라간다고 해서 요따만한 곳에 올라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까 얼굴이 잘 안 보일 정도로 가물가물 높은 거예요. 처음에 2∼3일 동안은 사실 많이 울었어요.”

“번개 맞아 죽어도 열사라고 할까요?”

이종선씨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거들었다.

“저희들은 올라갈 때만 해도 길어야 열흘이면 진압당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올라가 보니까 진압하기에 너무 위험하고 높은 곳이더라구요. 지금 생각하면 되게 순진했어요. 처음에는 떨어져 죽는 줄 알았어요. 생각보다 너무 높고, 바람 불면 흔들리고, 천둥치는 날이면 번개 맞아 죽을까봐 한잠도 못 잤어요. 그때 병구형이랑 그런 얘기도 했어요. 번개 맞아 죽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그렇게 죽어도 사람들이 ‘열사’라고 할까? 하하….”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던 고통이었을 텐데도 지나고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이종선씨의 얼굴이 약간 비장해지더니 중요한 얘기를 비로소 풀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 말이죠. 아무것도 되는 게 없고, 계속 밀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조합원들도 더이상 모이지 않고…. ‘아 이제 우리의 싸움은 졌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 때였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 ‘지도부라도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것 하나뿐이라는 생각이었어요. ‘진짜 아무도 안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런 각오도 했어요. 그렇지만 조합원들이 철탑 아래까지 매일 찾아와 주고, 몸에 등벽보 하나씩 붙이고 일하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이겼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런 조합원들을 두고 누가 배신할 수 있겠어요? 식사는 조합원들이 30m 밑에서 줄에 매달아 계속 올려줬어요. 철도 공안원들도 적극적으로 음식물 공급을 막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 사람들도 ‘우리도 다 잘 안다. 당신들 주장이 옳다는 거 다 안다’고 말했어요.”

이 대목에서 나는 궁금한 걸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소변은 어떻게 해결했어요?”

“비닐봉투를 많이 갖고 올라갔었거든요. 비닐로 여러 겹 싸서 큰 통에 계속 모아두었어요. ‘다음에 진압당할 때 무기로 사용하자’고 농담하기도 했어요. 하하… 저희들 내려온 다음에 조합원 동지들이 그 통 내리면서 정말 고생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이제 이야기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

“요즘 그 철탑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이런 멍청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사람을 무색하게 한다.

“별 느낌 없어요. 우리의 싸움은 마무리된 것이 아니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철탑 농성은 저희들에게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일이 아니에요. 철도가 죽으면 우리 국민 모두가 같이 죽는 거예요. 지금까지 신자유주의 공세를 제대로 막아 본 적이 없는데 그 돌파구를 어떻게든 마련해야지요. 그렇게 하라고 조합원들이 뽑아준 거고요.”

아직 해고 노동자 신분인 이종선씨는 철도노조 50년의 역사에 처음 들어선 민주노조 집행부의 교육2국장이다. 철도노조의 이런 활동들은 민주노조운동 역사 속에서 현재진형행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종선씨는 “귀밑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그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동자승 같은 얼굴로 긴 어려움들을 계속 헤쳐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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