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인권위에 한국 국가배상법을 제소하겠다고 나선 한석현씨의 싸움은 오래 계속된다
‘대한민국 킬링필드’는 지난 6월 중순에 발간한 <한겨레21> 364호 표지이야기 제목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한반도 남쪽지역에서만 100만명이 넘는 민간인이 군과 경찰 등 공권력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는 사실과, 50년 넘게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은커녕 진상규명작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고발한 내용이었다. 보도가 나간 뒤 반향은 뜨거웠다.
가구 하나 때문에 총살당한 아버지
그러나 이 기사는 희생자 유가족, 좀더 사실감 있게 말하자면 ‘살아남은 자’들의 생생한 증언기록이 없었다면 공허한 숫자놀음에 그쳤을지 모른다. 100만명. 숫자를 현실로 치환하는 감각이 웬만큼 발달하지 않고서야 그 숫자에서 어찌 야만의 피비린내를 제대로 맡을 수 있을까. 100만분의 1에 겨우 해당하는 희생자 유가족의 아픔은, 그래서 더욱 절망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노인은 집요했다.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 <한겨레21>에 자신의 사연을 하소연해왔다. 노인의 요청이 거듭될수록 기자는 ‘100만분의 1’이라는 숫자에 더욱 깊숙이 빠져들었다. 도대체 100만명의 학살극에 대한 해법도 찾지 못하고 있는데, 희생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노인의 ‘집념’은 끝내 기자의 ‘회의’를 압도했다. “제 고향은 충남 서산시 지곡면입니다. 한국전쟁이 난 1950년, 9·28 수복을 앞두고 아버지가 경찰한테서 모진 고문을 받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총살당했습니다.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도 부역자도 아니었습니다. 사상적으로 꼬투리 잡힐 만한 게 하나도 없는 평범하고 근면한 농민이었습니다.” 한석현(69)씨는 자신의 가족사를 풀어나갔다.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봐야 100만분의 1일 터이지만. 다만 익히 들어온 다른 사연들보다 조금 황당할 따름이었다. 아버지 한재봉(당시 50살)씨. 지곡지서 바로 앞에 살던 그의 가족은 당시 지서장 가족과 자연히 가깝게 지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순식간에 인민군이 밀고내려오자 지서장은 서둘러 후퇴를 하면서 재봉씨에게 관사에 있던 가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다시 경찰대가 지곡면에 들어온 건 9월 중하순께. 대대적인 부역자 색출작업이 벌어졌다. 그때 재봉씨는 지서장 가구를 훔쳐갔다는 이유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두 아들도 차례로 끌려갔다. “아버지 몸에 난 고문 상처에서 구더기가 끓었습니다. 아버지는 제 발로 걷지도 못해 들것에 실려 구덩이로 옮겨졌고, 그 안에서 다른 주민들과 함께 무차별 총격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며칠 뒤 주민들이 구덩이를 파보니 주검 42구가 나왔습니다. 고아가 된 우리 남매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형은 국군에 들어가고, 누이는 인천의 어느 집 수양딸로 들어가고, 난 고향 옆마을에서 머슴 노릇을 시작했습니다.”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꿈에 나타나
끔찍하고 가슴 아프지만, 이 역시 100만명의 사연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어느 희생자 가족의 삶인들 그뒤로 순탄했겠는가. 한씨는 형이 몇년 뒤 세상을 비관해 자살했던 얘기를 하면서는 눈물까지 찍었지만, 어차피 사정은 ‘100만분의 1’에서 크게 벗어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차츰 이어지면서 한씨는 단순한 사연 이상의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스물두살에 장교시험을 치러 직업군인이 되기도 했다가, 전역 뒤 사업을 하다 재산을 말아먹기도 했으며, 다시 공직생활을 하다가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때려치우기도 했다. 굴곡 많은 삶이야 개인의 운명으로 돌려야 할 일이었다. 그는 수십년 세월을 그렇게 체념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그 삶은 과거와는 철저히 단절한 삶이었다. 적어도 몇해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그에게 운명을 굴레씌운 건 하늘이 아니라 국가체계였다는 생각이 언제부턴가 차츰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시대의 아픔으로 새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밝혀주지 않는다’며 저를 호되게 나무라시는가 하면 눈물로 하소연하기도 하는 겁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선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꿈에 쫓기며 밤잠을 설친 게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뒤늦게 ‘커밍아웃’한 배경을 매우 설화적인 방식으로 설명해나갔다. 2000년 9월 한씨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가려줄 것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청와대를 비롯한 관계기관에 제출했다.
10월 말 경찰청장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민원회시가 돌아왔다. “당시 지서장 부인과 주민 진술에 따르면 경찰관 후퇴 당시 지서장으로부터 관사 물건을 관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민원인의 부친께서 가재도구를 옮겨놓은 것을 수복 뒤 경찰 선발대가 진입해 부친이 가재도구를 승낙없이 가져간 것으로 판단, 체포 처형한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생존자들의 진술을 종합해볼 때 부역한 사실은 없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회시 공문은 “다시 한번 귀하의 아버님의 희생을 진심으로 애도하며 귀하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과 가정의 행복을 기원합니다”라고 끝을 맺고 있었다.
50년 동안 가려 있던 학살의 진실에 한줄기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사실상 가해 당사자로부터 가해사실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추정’과 ‘애도’. 그 빛은 정확히 거기에서 멈춰버린 채 한뼘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공식서류가 남아 있지 않아 ‘추정’밖에 할 수 없고, 국가배상도 청구시효가 지났으니 ‘애도’밖에는 남은 게 없다는 것이었다.
한씨는 경찰과 몇 차례 공문을 주고받은 끝에 올 3월 헌법재판소에 국가배상 청구시효를 10년으로 제한한 국가배상법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청구서를 냈다. ‘현행 국가배상법은 국민에 대한 무한책임을 저버려 국민의 기본권에 침해를 가하고 행복추구권을 박탈하는 위헌 법률이다’라는 판결을 구한 것이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 행복권을 유린한 행위에 대해 개인간의 손해배상을 규정한 민법 조항을 차용한 것은 잘못이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돈이 없어 법률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지 못한 채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직접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낸 위헌법률심판청구는 절차상 결함을 이유로 심판 자체가 기각당했다.
그는 또 지역구 국회의원을 통해 국회에 국가배상법 개정을 청원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통합특별법이 추진되고 있는 지금도 그의 입법청원은 낮잠을 자고 있다. 통합특별법을 추진하는 쪽은 국가배상과 책임자 처벌문제는 굳이 언급을 피하고 있다. 이들 문제까지 다루다보면 입법 자체가 거센 저항을 받을 가능성이 크고, 학살을 증언할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은 처지에서 자칫 진상규명조차 어려워진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대로 끝낼 순 없다
“50년 만에 진실의 한 자락이라도 어렴풋이 밝혀졌으니 그게 어디냐. 아직 최소한의 사실조차 공식적으로 규명되지 못한 다른 수많은 희생자 유가족들과 비교해보라”는 말은 한씨에게 아무런 위안과 설득이 되지 못했다. “나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지 마라.” 그는 “내 사례가 어떻게 정리되느냐가 앞으로 다른 수많은 희생자 유가족들의 앞날을 좌우할 것이다. 내가 이대로 끝나면 국가는 그들에게도 추정과 애도로 끝내려 할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한씨는 독학을 통해 어느새 국가배상 전문가가 돼 있었다. 그는 “전쟁범죄 같은 반인륜적 사건에 대해서는 시효를 인정하지 않는 게 국제관행”이라며 “독일이 전쟁종료 뒤 55년이 지난 이제 나치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자국민 학살 만행에 대해 국가 차원의 배상을 하는 까닭은 무엇이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또 “유가족들은 단 한번도 억울함을 내비치기는커녕 피해사실조차 철저히 감추고 살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10년짜리 시효를 들이대는 게 문명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되물었다.
그는 국가의 책임에 대해서도 매우 원칙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5·18특별법이다 4·3특별법이다 하는 게 다 뭡니까. 지금 국회에서 추진중인 통합입법도 결국 특별법입니다. 어떻게 국가의 국민에 대한 책임을 기본법이 아닌 특별법으로 대체한다는 말입니까.” 그는 “국가는 국민에 대한 무한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며 “국가는 그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짐을 벗어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씨는 끝내 국회에서 입법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유엔 인권위원회에 한국의 국가배상법을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너무 이상적인 걸까, 아니면 우리 현실이 너무 척박한 걸까.’ 한씨와 헤어진 뒤 이런 의문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한씨의 싸움이 앞으로도 외롭고, 아주 길게 이어지리라는 것이었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사진/ “유가족들은 피해사실조차 철저히 감추고 살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10년짜리 시효를 들이대는 게 문명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되묻는 한석현씨.(이정용 기자)
노인은 집요했다.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 <한겨레21>에 자신의 사연을 하소연해왔다. 노인의 요청이 거듭될수록 기자는 ‘100만분의 1’이라는 숫자에 더욱 깊숙이 빠져들었다. 도대체 100만명의 학살극에 대한 해법도 찾지 못하고 있는데, 희생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노인의 ‘집념’은 끝내 기자의 ‘회의’를 압도했다. “제 고향은 충남 서산시 지곡면입니다. 한국전쟁이 난 1950년, 9·28 수복을 앞두고 아버지가 경찰한테서 모진 고문을 받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총살당했습니다.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도 부역자도 아니었습니다. 사상적으로 꼬투리 잡힐 만한 게 하나도 없는 평범하고 근면한 농민이었습니다.” 한석현(69)씨는 자신의 가족사를 풀어나갔다.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봐야 100만분의 1일 터이지만. 다만 익히 들어온 다른 사연들보다 조금 황당할 따름이었다. 아버지 한재봉(당시 50살)씨. 지곡지서 바로 앞에 살던 그의 가족은 당시 지서장 가족과 자연히 가깝게 지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순식간에 인민군이 밀고내려오자 지서장은 서둘러 후퇴를 하면서 재봉씨에게 관사에 있던 가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다시 경찰대가 지곡면에 들어온 건 9월 중하순께. 대대적인 부역자 색출작업이 벌어졌다. 그때 재봉씨는 지서장 가구를 훔쳐갔다는 이유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두 아들도 차례로 끌려갔다. “아버지 몸에 난 고문 상처에서 구더기가 끓었습니다. 아버지는 제 발로 걷지도 못해 들것에 실려 구덩이로 옮겨졌고, 그 안에서 다른 주민들과 함께 무차별 총격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며칠 뒤 주민들이 구덩이를 파보니 주검 42구가 나왔습니다. 고아가 된 우리 남매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형은 국군에 들어가고, 누이는 인천의 어느 집 수양딸로 들어가고, 난 고향 옆마을에서 머슴 노릇을 시작했습니다.”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꿈에 나타나

사진/ 범국민위원회 기자회견. 50년 동안 감춰진 진실이 이제야 서서히 빛을 보고 있다.(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