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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상처와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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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7-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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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방이 되고 있는 한 작가의 발언을 접하면서, 나는 어이없음과 궁금증과 착잡함을 한꺼번에 느낀다. 그는 탈세 혐의가 있는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라는, 어찌 보면 대단히 상식적이어서 지금까지 왜 안 해왔는지를 반문하게 되는 그러한 일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보였는데, 나치와 홍위병이라는 극언의 비유를 서슴지 않은 글들로 인해 대가급 대우를 받고 있는 작가라는 그의 명망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더욱 높아지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수많은 문인들이 투옥되고 고문당하던 폭력의 시기에도 함구하고 있던 그가 신문사의 세금납부 유무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더불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에게 현실에 대한 최소한의 안목이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킨예는 질문한다

짧은, 그러나 무거운 이야기 하나를 인용해보기로 한다.

“얼마 전 시인 킨예가 이러한 시기에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를 써도 되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써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를 썼는지 물어보자, 그는 못했다고 대답했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독자들이 즐길 수 있는 체험으로 만드는 것이 제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비 피할 잠자리가 없어 빗방울이 옷깃과 목 사이로 그대로 떨어지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즐길 수 있는 체험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제 앞에서 저는 그만 움츠러들었어요.’ ‘예술은 오늘의 상황만을 고려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언제나 빗방울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시가 더 오랜 생명력이 있을 것이네.’ 나는 짐짓 이렇게 떠보았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만약 옷깃과 목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그런 사람이 더이상 없다면 그런 시가 쓰여질 수 있겠지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는 가능한가?’라는 고통스러운 화두를 안고 몸시질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통과하면서, 브레히트가 가상의 시인 ‘킨예’를 통해 자신의 문학관을 표현한 짧은 글이다. 이는 굳이 아우슈비츠를 빌리지 않더라도, 학살과 폭압의 현대사를 통과하면서 이 땅의 많은 문학인들이 끌어안아야 했던 화두이기도 하다.

이 땅의 많은 젊은 문학인들이 꿈꾸었던 ‘문학’과는 다르게, 논란이 된 발언의 뒤를 이은 젊은 소설가이자 대학교수의 발언은, 이들의 현실인식 결여가 단순한 결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확고한 신념체계로 작동하는 주류의 힘으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동시에 불행하게도, 그들 스스로 왜곡시킨 현실의 우리 속에서 약육강식하는 짐승으로서 문학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문학이라는 몸을 빌려 어떤 이는 문명의 폭력 아래 상처입은 자연을 노래하며, 어떤 이는 제도 속에 억압된 욕망을 불러내어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본능으로서의 관능을 노래하고, 어떤 이는 현실 모순에 대한 날선 분노와 풍자를, 어떤 이는 별과 우주를 노래하며 인간 영혼의 타락을 속죄하려 한다. 이 다양한 발화의 뿌리에는 개개의 존재가 처해 있는 ‘현실’이 있고, 현실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얻을 수밖에 없는 ‘상처’가 있다. 한 개인의, 한 시대의, 가장 아픈 상처가 무엇인지 짚어내고 그 상처의 치유를 위한 갈망이 몸을 입게 될 때, 그 몸은 작가의 현실인식― 세계와 나에 대한 고통스러운 응시로부터 출발한다.

선악미추 속에서의 작가의 현실인식

이 현란한 시대에 아직도 문학이 의미를 지닌다면, 그것은 문학이 상처로부터 출발하지만 상처를 넘어서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진실로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묻고 이름 붙이며 어떤 형태로든 아름다움을 복원하려는 꿈꾸기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선악미추가 뒤엉긴 삶이라는 미로 속에서 작가의 현실인식은 가장 치열하게 깨어 있어야 하며 끊임없이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동반해야 한다. 작품 내외적인 장에서의 발화, 그 어느 편에서도 작가는 타인의 ‘정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들이므로 특히나 그러하다.

가상의 시인 ‘킨예’가 옷깃과 목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빗방울을 노래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고 물었듯, 상처입은 자와 억압당하는 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하여 자신과 세계의 구원을 향해가는 불가능한 꿈꾸기가 문학의 처음이며 끝이다. 모든 작가가 킨예처럼 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작가정신’이란 장이로서의 기예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문학은 깨어 있는 ‘삶’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적어도 인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반성과 현실인식을 결여한 대가급 작가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자유를 향해 열린 길인가를 고뇌하며 물을 줄 아는 무명작가 한 사람의 무게보다 가볍다.

김선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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