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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다른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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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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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중에 국경일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8·15가 우리의 최대 국가명절이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하지만 8·15가 꼭 기쁜 날만이 아닌 것도 분명합니다. 미완의 광복을 맞는 감회는 그래서 언제나 기쁨과 착잡함이 교차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정부의 대북선언이 유독 8·15에 시기를 맞추곤 했던 것도 이 날이 갖고 있는 역사적 상징성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제의는 메아리 없는 일방통행식 외침으로 끝나기 일쑤였고, 그뒤에 남는 것은 이전보다 더한 반목과 대립이었습니다. 요즘에는 뜸해졌지만, 한때는 8·15를 전후해 판문점으로 향하는 학생들의 시위와 이에 원천봉쇄로 맞선 당국간의 물리적 충돌까지 겹쳐 어수선한 8·15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독일이 통일이 된 뒤에는 8·15를 맞는 착잡한 심정이 더했습니다. 그것은 부러움과 선망, 시샘, 자괴감 같은 것이 뒤엉킨 묘한 심사입니다. 독일이 동서로 나뉘어져 있을 때는 그나마 같은 분단국이라는 동병상련의 위안이라도 느꼈는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이제는 우리만 남았다’는 외로움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다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듯, 일본쪽에서 때맞춰 망언이라도 나오면 가뜩이나 복잡한 심사는 더욱 뒤틀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8·15는 여느 해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속에서 맞고 있습니다. 감격과 설렘, 기대와 희망이 충만한 광복절입니다. 이 날을 달력에 빨간 날짜로 표시된 공휴일 정도로 여기고 지나가는 대다수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이번 8·15는 뭔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반세기 만에 고향땅 북한을 찾아가고 남쪽으로 찾아온 피붙이를 맞이하는 이산가족이 아니어도 그런 감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베를린 충격’ 못지않게 ‘한반도 충격’을 전세계에 줄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드는 오늘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만드는 왜곡된 역사교과서 이야기(기사 26쪽)를 접해도 왠지 예전보다는 좀더 느긋하게 밑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남북의 화해 기류는 해외에까지도 훈풍을 실어보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남북 양쪽을 대신해 갈등과 대립의 치열한 대리전을 벌여온 일본의 재일동포사회에도 조금씩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소식(표지이야기 10쪽)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거대한 빙벽은 분명히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고정관념이 여지없이 깨져나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숨가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속도 또한 눈이 핑핑 돌 정도입니다. 육로를 통한 개성관광이나, 남북한 직항로 개설, 언론사의 평양 주재 특파원 파견 등도 한낱 꿈만이 아닌 가까운 미래로 다가오는 듯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북한사회와 지도층에 가졌던 막연한 생각들도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정관념의 유쾌한 유린입니다.

앞으로도 우리에게는 또다른 수많은 충격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서울을 찾아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우리의 국군 수뇌부가 경례를 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가까운 시일 안에 볼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고정관념의 우산 속에서 걸어나오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동을 걸고 출발한 화해와 공존의 기관차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년 8·15는 올해보다 더욱 기쁜 마음으로 맞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한겨레21편집장 김종구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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