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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깊은 슬픔, 풀꽃을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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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7-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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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고운 세상을 위하여 풀꽃세상 대표 정상명씨가 뿌리는 꽃씨

사진/ 풀꽃세상 가족들. 정상명씨는 건물을 지키는 경비 아저씨도 같은 한가족이니 꼭 같이 찍어야 한다고 고집해 함께했다.(박승화 기자)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가슴 한구석에 군불을 지핀 듯 서서히 뜨거워지는 체험을 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홍익대 앞 ‘피카소 거리’의 ‘풀꽃빌딩’을 찾아가면 된다. 그곳에 자리한 ‘풀꽃세상을위한모임’ 사무실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요즘 세상에도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때묻지 않은 순진무구형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자연의 온갖 사물에 ‘풀꽃상’을 주는 일을 3년 남짓 해오고 있는 이 환경단체는 생명에 대한 사랑과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마치 풀씨가 바람에 퍼지는 것처럼 조용히 세상에 전파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첫 번째 1000번 회원 전초영


‘1번부터는 왠지 숨이 막혀서’ 1000번부터 시작되는 회원고유번호의 영예로운 첫 번째 회원 1000번은 고 천초영씨다. 초영씨는 1998년 24살의 나이에 화재로 숨진, 풀꽃세상 대표 정상명(52)씨의 딸이다.

“초영이 방에서 갑자기 불이 났어요. 손쓸 새도 없었지요. 정신을 잃으면서도 하느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냥 편히 갈 수 있게 빨리 데려가시라고… 그러면서 떠오른 생각이 ‘남은 여생을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이었어요.”

불이 나는 현장에서 자식을 구하지 못하는 그 어미의 심정보다 더 깊은 슬픔이 어디 있으랴. 그날 이후 어느날 거울을 보았더니 자신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더란다. 너무 큰 슬픔이 온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해 준 덕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정상명씨는 ‘남을 위해 사는’ 인생을 선택하는 것으로 그 큰 슬픔을 훌륭하게 이겨내고 있었다.

“딸애 이름이 초영(草英)이에요. 바로 풀꽃이죠. 풀꽃은 죽어서도 다시 사는 것처럼, 초영이가 죽고 제가 다시 살아난 거죠.”

“그 사건이 있기 이전과 이후의 삶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이 뭐냐?”는 나의 진부한 질문에 정상명씨는 활짝 웃으며 답한다.

“저요? 정말 많이 예뻐졌어요.”

자신을 예쁘게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딸아이라는 고마움으로 정상명씨는 자신의 삶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가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내미는 초영이에 관한 추억이 오로지 슬픔만은 아니다.

지금도 풀꽃세상 사무실과 칸막이 하나로 구분된 정상명씨의 작업실 한쪽에는 정말 예쁜 초영이의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앞에 초 한 그루와 작은 향로 하나가 마련되어 있다. 초영이는 매일 엄마의 마음속에 살아나는 자기의 모습- ‘풀씨’(풀꽃세상에서는 회원들을 ‘풀씨’라고 부른다)들이 세상에 퍼져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풀꽃세상이 하는 가장 큰 일은 세상의 사물들에게 ‘풀꽃상을 드리는 것’이다. 정상명씨는 고집스럽게 항상 “상을 드린다”고 표현한다. 그 말은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심을 담은 표현이고 “말을 바꾸면 생각도 바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사물과 인연을 맺은 사람에게 부상을 함께 ‘드린다’.

1999. 3. 29.의 첫 번째 풀꽃상은 “비오리는 나그네새였지만 텃새가 되었습니다”라는 표어와 함께 ‘동강의 비오리’에게 드렸다. 그리고 동강의 아름다움을 감동적으로 보여준 KBS 자연다큐멘터리팀에 부상을 드렸다.

시 구절 같은 풀꽃상 수상 표어

사진/ 풀꽃세상 건물 앞에서. 풀꽃세상 사무장 심현숙씨는 그를 “한마디로 꽃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박승화 기자)
그때부터 풀꽃상은 모두 일곱 차례 드려졌는데, 마치 정성스럽게 갈고 다듬은 시 구절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와서 박히는 짤막한 수상 표어를 여기에 함께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2회 ‘보길도의 갯돌’- “보길도의 해변에는 아름다운 갯돌이 있습니다.”

3회 ‘가을 억새’- “우리는 억새 한 포기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4회 ‘인사동 골목길’- “골목길은 메마른 땅에 흐르는 개울과 같습니다.”

5회 ‘새만금 갯벌의 백합’- “백합은 갯벌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6회 ‘지리산의 물봉선’- “지리산 계곡의 물봉선을 그대로 놔두세요.”

지난 6월16일에는 지렁이에게 제7회 풀꽃상이 드려졌다. “2억만년 전에 이 행성에 출현해 생태계 먹이사슬의 최하위의 지위를 굳건히 지키면서 땅 밑 어둠 속에서 흙을 부드럽고 기름지게 만들다가” “마침내 인간의 야만적인 생태계 파괴에 의해 서서히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는 데 대한 진심어린 사과와 뒤늦은 애정”이 선정 이유였다.

지난 5월24일, 서울 도심 한복판 명동에서 세종로까지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님이 비오듯 땀을 쏟으며 세 걸음에 한번씩 절을 하는 ‘새만금갯벌을 살리기 위한 삼보일배(三步一排)’ 의식을 벌였을 때, 풀꽃세상 대표 정상명씨는 시민사회단체 대표들과 함께 플래카드를 들고 이들을 끝까지 뒤따라갔다.

“풀꽃세상을 만들면서 내가 시위대의 맨 앞에 서게 될 거라는 상상은 하지도 못했어요. 저같이 약한 사람이 시위에 앞장서야 할 정도로 우리나라 환경 상황은 위기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시민들의 참여예요.”

자연을 지키는 일은 곧 자연을 훼손하는 나쁜 사람들과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한없이 곱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야만 어울릴 법한 정상명씨의 변화가 웅변으로 보여준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 마음속에서 갑자기 징 하나가 크게 울더니 “회원가입원서 하나 주세요”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고, 나도 곧 자랑스러운 2908번째 풀씨가 되었다. 지갑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돈을 집어 ‘가입기념특별회비’(풀꽃세상에 이런 회비는 없다. 내 마음대로 붙인 이름이다)를 내면서 “제가 나중에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예요. 아, 그때 내가 조금만 참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게 될 거예요” 했더니, 풀꽃세상 사무처장 일을 보고 있는 최성각씨가 사무실 저쪽 건너편에서 “저런 유머를 가진 사람은 악인이 될 수 없지”라고 말한다.

“꿈꾸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꿔요”

‘지리산의 물봉선’에게 제6회 풀꽃상을 드릴 때, 함께 드리는 부상은 ‘실상사의 세 스님, 도법·수경·연관 스님’이 받았다. “일찍부터 지리산 자락에서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근원적 생태사상을 온몸으로 살고 계신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과 스님들이 포함된 한국불교가 이제 우리 환경운동사에 끼칠 엄청난 영향력에 미리 감동하여” 그 상을 드렸는데 “귀 밝아서 일찍부터 물봉선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함께 앓아오신 실상사의 세 스님들”은 공교롭게도 최근 해인사의 청동좌불 건립에 관한 비판여론에도 동고동락(同苦同樂)하게 되어 21일의 단식정진기도에 들어갔다.

풀꽃세상 사무실 일꾼들은 스님들을 꼭 찾아뵈야 한다고 내려가기로 했는데, 정진기도중에 찾아뵈면 단식중인 스님들을 더 힘들게 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부랴부랴 짐을 꾸려야 한다고 해서 인터뷰를 서둘러 마쳤다. 정상명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꿈꾸는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는 거예요. 이 다음에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이 되어야지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모르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에요.”

하종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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