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가 언니에게 다시 연락을 한 것은 지난 5월이었다. 그 사이 20년이 흘렀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서울 원자력병원에서 진단을 해보니, 폐암이었다. 언니는 “배운 것도 없이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고 말했다. 언니가 최씨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줬다. 석 장이었다. 하나는 다방에서 일하던 시절의 사진이었다. ‘남지다방’이라고 적힌 카운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알록달록 색동저고리에 특이하게도 검은색 치마를 입었다. 볼에 살이 오른 그는 밝게 미소짓고 있었다. “30대 초반일 때”라고 최씨가 말했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맞춰 아파트를 다시 찾았다. 최씨는 잠들어 있었다. 아기처럼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병원에서는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분홍색 바탕에 붓꽃이 그려진 잠옷을 입고 있었다. 왼손 주먹을 반쯤 움켜쥐고 오른쪽은 가슴 위에 얹은 채 잠이 들었다. 입은 앞니가 드러나도록 벌리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햇살에 얼굴이 반짝였다. 자매는 새벽 4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동생은 낮은 침대 위에서, 언니는 바닥에서 잤다. 동생은 언니가 잠든 바닥으로 내려오려고 몸서리를 치다가 떨어졌다. 언니랑 나란히 눕고 싶었기 때문이다. 늙은 언니는 동생을 다시 침대로 올렸다. 몸에 연결된 일종의 인공방광인 ‘유치도뇨관’이 몸보다 낮은 곳에 있어야 했다. 스스로 배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환자들에게는 소화기관에 유치도뇨관이 연결됐다. 도뇨관을 통해 나온 소변은 투명한 비닐백에 쌓이고, 간병인이 수시로 비워준다. 언니와 함께 자려는 동생 때문에 언니가 결국 항복했다. 좁은 침대 위로 두 자매가 나란히 누웠다. 자매는 30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 이야기를 하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60대의 노환자는 소녀가 됐다. 아침에 일어서서는 남대문시장에 가서 옷을 사자고 언니를 보챘다.
잠든 최씨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어쩌면 남대문에서 장을 보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몰랐다. 1시간 뒤 그가 깼다. 차에 태웠다. 백미러를 통해 본 최씨의 표정은 어두웠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들르는 집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바깥 온도는 8도 남짓했다. 병원에 돌아온 뒤, 최씨는 다시 집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최씨의 병실에는 또 한 명의 환자가 있었다. 김종희(47·가명)씨였다. 유방암을 앓고 있었다. 다른 환자들보다 의식도 또렷하고, 상체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식사도 혼자 할 수 있었고, 칫솔질도 혼자 했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한번은 무료한 김씨를 위해 휠체어에 태우고 뒷마당을 산보했다. 옷을 두둑하게 입혔지만 날씨가 몹시 쌀쌀했다. 괜찮냐고 물어도 “괜찮다”는 답만 계속했다. 병실에 돌아와서도 “고맙다”는 답만 했다. 무언가 다가서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의 말에는 ‘치료자와 치료받는 자’ 사이에서 은연중에 형성되는 일방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듯한 느낌이 실렸다. 상대를 배려하지만 동시에 상대방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 어쩌면 죽음에 대면한 사람이, 도대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보일 수 있는 나름의 대응 방식 같았다. 자신의 죽음과 고독하게 직면한 사람이 어쩌면 가장 예의 바르게 타인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방식일지도 몰랐다. 그는 병동에서 가장 건강했지만, 가장 위태로워 보였다. 안경 너머 그의 눈빛은 선했지만, 왠지 초조하게 외로웠다.
김씨의 이야기는 조각으로만 들었다. 워낙 과묵한 성격이었다. 김씨는 광주 출신이었다. 20년 전 결혼한 남편과는 이혼했다. 이혼한 뒤에는 “살기 위해” 식당일을 했다. 모든 종류의 식당일을 했다. 일식집이 그나마 가장 편했고, 고깃집이 가장 힘들었다. 월세 35만원짜리 방에서 혼자 살다가 암에 걸렸다. 동사무소의 소개를 받고 성가병원에 오게 됐다.
병원 701호 한순택(91)씨가 침대에 앉아 이를 닦고 있다. 병원에서 실습을 하고 있는 신학생 박혁진 학사가 한씨의 시중을 들고 있다.한겨레 정용일
조용한 호스피스에도 가끔은 소동이 있다. 이번에는 난동에 가까웠다. 정영희(49·가명)씨 때문이었다. 그는 3일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정씨는 165cm 정도 되는 키에 얼굴이 무척 야위었다. 얼굴색이 거무스름했다. 병색이었다. 회색 오버에 푸른색 트레이닝복, 은색 운동복을 입었다. 모현호스피스라는 다른 가톨릭 단체의 안내를 받아 왔다. 그곳의 김은배 수녀가 동행했다. 환자의 휘청거리는 모습이 위태로웠다. 환자는 2층 내과에 들러 이승훈 의사와 상담을 했다. 정씨가 검사를 받는 동안 남편 홍영준(가명)씨가 부인에 대해 입을 열었다. 부인의 암은 지난 3월에 발견했다. 남편은 “겁이 나서 치료도 못하고 내버려뒀다”고 한다. 아내마저 어떻게 되면 어쩌나 싶었다. 남편은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홍씨는 “내가 아내를 죽인 셈”이라고 중얼거리듯이 자책했다. 그는 병원 사람들에게 계속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에서 술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그는 “너무 괴로워서 술이라도 먹지 않으면 힘들다”고 말했다.
간단한 입원 수속을 마쳤다. 기자는 이날 김은배 수녀와 함께 가정방문 활동에 나섰다. 병원을 떠난 지 2시간이 안 돼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남편 홍씨가 병원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얘기였다. 전화기에 실려오는 얘기를 들어보니, 홍씨가 부인을 다시 데려가겠다고 우기고 있었다. 영문은 알 수 없었다. 술 취한 그는 “기분이 나쁘다”는 말만 반복했다. 병원 근처 어디선가 술을 먹은 듯했다. 김 수녀는 난처해 보였다. 자신이 데리고 온 환자였다. 그렇다고 그를 기다리는 환자들과의 약속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 환자를 찾으러 가는 중에 병원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정씨가 아예 윗도리까지 벗고 폭력을 휘두른다고 전해왔다. 김 수녀가 가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부인의 동의를 받아 경찰을 부르거나 부부를 그냥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차를 운전하면서 김 수녀의 혼잣말이 나왔다. “영희씨 불쌍해서 어떡하나. 집에 돌아가면 남편한테 또 맞고 살 텐데….”
6시간 뒤, 병원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홍씨는 끝내 부인을 데리고 갔다. 입원한 지 불과 6시간도 안 됐다.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정씨를 끌고 병원 문을 나섰다. 김 수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정씨가 걱정됐다. 그는 단호하게 대처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동안 정씨에게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했다. 남편 홍씨에게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똑똑히 보게 해야 한다고 김 수녀는 말했다. 정씨의 약이 문제였다. 정씨에게는 진통제가 필요했다. 전문적인 간호도 필요했다. 그걸 홍씨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일단 약은 우편으로 보내야겠어요” 김 수녀가 말했다.
노름빚으로 ‘빨갱이’에게 팔려가다
702호 옆에는 여성용 병실이 하나 더 있었다. 710호였다. 이 병실의 환자들은 대체로 조용했다. 병실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한순택(91)씨가 누워 있었다. 90을 넘은 나이지만 눈빛은 빛났다. 자원봉사자가 찾을 때마다 손을 힝없이 들어 반겼다. 직장암을 앓는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끔 찾아오는 중년 여성도 “성당에서 만난 사이”라며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두 사람의 눈매와 코는 닮은 듯했다.
띄엄띄엄 말하는 한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는 일본 도쿄에서 법대를 나왔다. 1919년생이니까, 1940년을 전후해 도쿄에서 공부했다는 말이다. 고향이 충남 아산인 그는 어릴 때 집에 전화기가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그는 “벽에 거는 전화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 돌아와 혜화동에서 유치원 선생님을 했다. 왜 법조계에 몸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전쟁 때문”이라고 끊어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씨는 발이 유독 저리다고 했다. 종종 그의 발을 주물러줬다.
한씨의 옆 침대에는 장은숙(80)씨가 말없이 누워 있었다. 뇌종양을 앓는 그는 거동이 불가능했다. 뇌 기능이 떨어지면서 음식을 소화하지 못했다. 11월 들어서는 매일 포도당 수액 500㏄로 명을 잇고 있었다. 그는 그저 눈만 껌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눈의 초점에는 변화가 없었다. 허공을 향해 치켜뜬 동공의 테두리에 옅은 푸른색 테두리가 둘러졌다. 그의 시선이 꽂히는 지점에 누군가 성모마리아 그림을 놓았다. 머리맡 형광등 위에 놓인 우편엽서 크기의 그림 속에서 성모마리아는 그를 마주 내려다봤다. 성모의 눈은 진한 파란색이었다. 그림에는 환자를 위한 기도가 적혀 있었다.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며/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병원을 찾은 그의 둘째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씨는 평안북도 선천 사람이다. 초등학교는 다니다가 말았다. 한글을 간신히 읽는 수준이다. 결혼은 “빨갱이”랑 했다. 그의 오빠가 “화투를 치다가” 돈을 잃었다. 노름빚을 갚기 위해 장씨는 “빨갱이에게 팔렸다”. 남편 이름은 장맹필이었다. 딸이 생겼다. 이름은 순옥이었다. 1·4 후퇴 때 남편과는 헤어졌다. 피난 가다가 둘째 남편을 만났다. 새 남편은 순옥이를 서울 신촌의 큰 쌀집으로 넘겼다. 모두 굶던 시절이었다. 어차피 잘된 일이었다. 남편에게는 첫째 부인이 있었다. 장씨는 둘째 부인이었다. 장씨는 딸 둘을 낳았다. 가족은 서울 창신동에 자리잡았다. 두 딸이 나이가 들면서 장씨는 집을 나왔다. 둘째와는 25년 전부터 함께 살고 있다. 두 딸은 가족관계등록부로는 첫째 부인의 자녀로 돼 있었다. 덕분에 그는 독거노인으로 수급권을 받을 수 있었다. 뇌종양으로 쓰러진 것은 4년 전이었다. 둘째딸이 정성으로 돌보고 있다.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양대병원과 길병원을 거쳐 이곳까지 오게 됐다. 딸은 어머니를 보며 “남한테 나쁜 짓 한 번 안 하고 착하게 살아온 분”이라고 말했다.
장씨의 맞은편에는 조미희(60·가명)씨가 종종 이불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의 몸은 부러질 듯 앙상했다. 위암을 앓고 있었다. 지난 6월 수술을 시도했지만, 식도까지 암이 전이돼 “배를 다시 덮었다”. 앙상해진 자신의 팔을 보며 “이제는 괴물같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호스피스에 온 첫날인 11월12일 병원에서 주는 링거를 거부했다. “그거 맞으면 더 사는 거 아니냐”라고 말했다. “일찍 죽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정서적으로도 불안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샤워실을 찾아 목욕을 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였다. 샤워실로 이동하다가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간호사들은 긴장했다. 병원 복도를 불안하게 오가던 그는 사흘 만인 15일에 병원을 떠났다. 그에게 전화를 했다. 병원에서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예민한 성격 탓”이라고 말했다.
태풍이 날려버린 희망
여고를 졸업한 그는 결혼하기 전까지 정부 부처에서 일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았다. 남편은 폭력적이었다. 이혼했다. 20년 전 얘기였다. 10년 전 강원도에서 작은 식당을 열었다. 2003년에 몰아친 태풍 ‘매미’가 인생을 바꿨다. 식당 주변이 온통 쑥대밭이 됐다. 자동차와 임대아파트를 정리했다. 남은 것은 빚만 4500만원이었다. 그 빚을 갚으려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간병인, 베이비시터, 파출부 등의 일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과 줄지 않는 빚은 마음의 병을 만들었다. 지난봄 변비가 심하게 왔다. 변비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다. 내시경을 햇다. 위암 3기 판정을 받았다.
그는 기자와 통화한 아침에 “면도칼로 동맥을 자르려고 한다”고 말했다. 아침에 미음을 두 숟가락 먹었다고 했다. 간호를 받을 수 있는 병원으로 오라고 권유했다. “집 안에서 조용히 죽고 싶다”고 답했다.
조씨가 병원을 떠난 지 2주가 지난 뒤, 장경옥(64)씨가 짐을 싸서 입원했다. 조씨가 눕던 병상에 자리를 잡았다. 폐암을 앓는 환자였다. 얼굴의 굵은 선은 강인한 인상을 줬다. 오른쪽 가슴과 무릎 양쪽에 통증을 호소했다. 양쪽 무릎을 계속 주물러줬다. 그는 서울 신당동이 고향이었다. 무학여고를 나왔다. 학교를 졸업해서는 재봉일을 했다. 혼자 군고구마 장사도 했다. “추운 날은 정말 매서웠다”고 말했다. 20대에 결혼했지만 금방 이혼했다. 40년을 혼자 살았다. 자식은 없었고, 혼자뿐이었다. 형제도 없었다. “먼 친척”만 있을 뿐이었다. 그를 먹여살릴 수 있는 가족이 없어서,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됐다. 그는 “호스피스가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다. 설명해줬다. 그가 표정을 찌푸렸다. 어느 정도는 체념한 듯했다. 무릎을 계속 주물러줬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호스피스 702호 최효인(62·오른쪽)씨를 찾은 언니 정인(74)씨가 환자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20년 동안 떨어져 있던 자매는 지난 5월 다시 연락이 닿았다.한겨레 정용일
그렇게 11월이 점차 기울어갔다. 환자들은 계속 움직였다. 12월의 어느 날 병원을 다시 찾았다. 설암을 앓던 서창호씨는 아예 병원을 떠났다. “집에 보일러를 고치고 오겠다”던 그는 소식이 끊겼다. 휴대전화로 전화를 했다. 그가 휴대전화 너머에서 “지낼 곳이 있어서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지낼 곳’이 어디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지방”이라고만 말했다. 기자의 말에 그는 건성으로 답했다. 더 이상 물을 수는 없었다.
김성구씨는 5층 일반병동 입원실로 옮겨졌다. 치료를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병원 쪽의 판단 때문이었다. 5층으로 찾아가니, 그는 복도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치는 사람은 더 많았지만, 그의 눈은 계속 쓸쓸했다.
최효인씨의 언니는 여전히 매일같이 동생을 찾아왔다. 과일을 갈아와서 동생에게 먹이고 있었다. 고개를 잘 가누지 못하던 최씨의 얼굴이 조금은 더 밝아졌다. 말이 없던 김종희씨는 표정이 더 굳어졌다. 허리 통증이 하반신까지 옮겨졌다. “하반신에 감각이 없다”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한정희 간호사는 “종희님이 응어리를 마음속에 담고 풀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소란을 피운 홍영준씨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답은 없었다. 부인인 정씨에게 전화를 했다. 고3인 딸이 받았다. “엄마가 집에서 통원 치료를 받는다”고 대답했다. 잠시 발을 끊었던 김은배 수녀도 다시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를 찾아왔다. 아빠는 “노동일” 하러 나갔다. 월세 20만원짜리 방에 엄마와 딸이 있었다.
한순택씨과 장은숙씨는 701호에서 거의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장경옥씨는 인상을 잔뜩 쓰고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을 사흘 만에 떠나간 조미희씨에게 전화를 했다. 연락이 닿지 않았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집을 찾았다. 단독주택의 구석에 난 작은 철문을 열고 길게 담을 따라 돌아간 곳이 그의 방이었다. 월세 20만원짜리였다. 돌계단을 세 번 밟고 이른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겨울바람이 찼다. 바람에 떨어진 낙엽으로 현관 앞은 어지러웠다. 다음날 그의 아들과 연락이 닿았다. 최씨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12월5일 원자력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아들은 말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20일 넘게 거의 곡기를 끊어서 마지막은 아주 조용히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빚 때문에 스트레를 많이 받았다”고 그는 덧붙였다.
하반신에 장애가 있던 이승호씨가 돌아간 때는 5일 뒤인 12월10일 새벽이었다. 다음날 빈소를 찾았다. 성가복지병원 옆의 작은 장례식장이었다. 찾는 이 없는 빈소는 조용했다. 누이동생 내외와 조카딸, 그리고 누이동생의 친구 2명뿐이었다. 사진 속에서 이씨는 젊었다. 하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이생에서 오래 웃지 못한 얼굴을 영정 속에서 펴보이는 듯 했다. 그의 누이동생은 “마땅히 쓸 사진이 없어서 젊을 때 찍은 것을 썼다”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조문객 명단을 봤다. 이틀 동안 다녀간 조문객이 23명이었다.
2400여 명의 아픈 죽음
12월에 들어온 낯선 환자들도 서둘러 성가복지병원 7층을 떠나갔다. 자궁경부함은 앓던 이정화(46·가명)씨는 11일 10살 딸이 울면서 임종한 가운데 사망했다. 결장암을 앓던 김무영(81·가명)씨도 같은 날 2시간 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숨을 거뒀다. 지난 1992년 성가병원 호스피스가 문을 연 이후 이날까지 사망한 이는 2403명이었다. 가난해서 아프게 죽음을 맞은 이들이었다.
글 김기태 기자
kkt@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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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명의 경제 수준 비교해보니
‘평생 빈곤층’이 10년 일찍 말기암에 이르러
호스피스에서 만난 환자 15명의 경제적 수준을 살펴봤다. 15명 가운데 3명을 제외한 12명이 기초생활수급권자였다. 김성구·정영희·조미희씨 3명은 배우자 혹은 자녀가 경제능력이 있어서 수급권자가 되지 않았다. 이들은 건강보험에 가입했다. 물론, 이들 3명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본인 혹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15명의 과거 경제 상태를 가늠해보았다. 그리고 과거에 대체로 중·상류층에 속했다가 하류층으로 떨어진 경우와 일생 동안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 김종희씨 등 8명이 중·상류층 생활을 하다가 인생의 한 단계에서 빈곤층으로 떨어진 것으로 분류됐다. 서창호씨 등 나머지 7명은 평생 가난 속에 살았다.
두 집단의 평균연령을 구해봤다. 첫째 집단의 평균연령은 69.9살이었고, 둘째 집단은 59.3살이었다. 두 집단이 말기암에 걸려 호스피스로 들어온 연령은 10살 이상의 차이를 나타냈다. 물론 분석 대상자 규모가 작아서 통계적으로는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우연의 일치만으로도 볼 수 없다. 소득수준에 따른 암사망위험비는 뚜렷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손미아 강원대 교수(예방의학)가 2008년에 낸 ‘암 발생과 사망의 건강불평등 감소를 위한 역학지표 개발 및 정책개발연구’ 보고서를 보면, 암사망위험비는 소득 상위 1%가 암으로 100명 사망할 때, 기초생활수급권자는 두 배 가까운 196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집단의 연령별 인구 분포가 같다고 가정할 때 나온 수치였다. 가난할수록 암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영국 정부가 2000년에 낸 ‘전국민건강보험(NHS) 암계획’ 보고서에서는 암 발생률을 낮출 수 있는 변수로 흡연과 식생활을 꼽으면서, 이 두 가지가 개인의 인생사에 걸친 사회·경제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관됐다고 분석했다. 성가복지병원 호스피스의 두 집단에서 다르게 나타난 평균연령을 이들의 과거 경제적 배경과 분리하기 힘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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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명의 학력 살펴보니
호스피스에 온 나이, 저학력층이 3살 낮아
호스피스 환자 15명의 학력 분포는 폭이 넓었다. 무학에서 대졸까지였다.
담낭암으로 사망한 장인철(68·가명)씨는 배움의 기회가 없었다. 초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거나 졸업한 이가 5명이었다. 대부분 고졸 정도의 학력이었다.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이는 한순택씨가 유일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도쿄로 유학해 법대를 졸업했다.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들을 다시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 고졸 이상 학력을 가진 집단과 나머지 집단이었다. 한순택씨 등 7명이 고졸 이상 학력이었고, 나머지 8명은 그보다 배움이 적었다. 학력이 높은 집단은 평균나이가 65.9살, 낮은 집단은 62.8살이었다. 말기암으로 호스피스 병동에 오게 된 나이가 평균 3.1살 차이가 나는 셈이다. 배움이 많은 쪽 평균나이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국민 전체의 경향은 어떻게 나타날까? 손미아 강원대 교수(예방의학) 등이 만든 ‘암 발생과 사망의 건강불평등 감소를 위한 역학지표 개발 및 정책개발연구’를 다시 펼쳐보았다. 보고서를 보면, 대졸 이상 학력의 인구 가운데서 100명이 암으로 죽는 동안 고졸 학력자는 122명이 사망했다. 집단마다 연령 분포가 다른 점을 감안해서, 연령 분포가 같도록 인구를 보정한 뒤 계산한 결과였다. 같은 조건에서 중졸 학력자는 157명이,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168명이 사망했다.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인구는 암으로 죽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매우 낮게 나타났다.
학력은 개인의 수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2008년에 내놓은 ‘건강수명의 사회계층 간 형평성과 정책과제’ 보고서를 보면, 2005년 기준 20살 성인 가운데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49년을 더 살 것으로 기대되지만,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인구는 62살을 더 살 것이라는 기대치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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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명의 가족관계 들여다보니
절반이 ‘제1의 안전판’ 가족과 결별
호스피스를 처음 찾는 환자들은 종종 가족관계를 숨겼다. 때로 “가족이 없다”는 거짓말도 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기초생활수급권 혜택 때문이었다. 경제활동이 가능한 자녀나 배우자가 있으면 수급권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또 성가복지병원도 노숙인, 행려환자, 영세민, 이주노동자, 차상위 계층 등 경제력이 없거나 취약한 계층을 치료 대상으로 하고 있다. 환자들은 자칫 호스피스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조바심 때문에 가끔 없는 말을 했다. 둘째, 가족이 있어도 실제로는 연이 끊긴 경우가 많았다.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남’이 된 탓이었다. 이런 마당에 연락이 끊긴 ‘경제력 있는’ 가족은 오히려 당사자에게 복지 혜택을 가로막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두 가지 이유는 자주 맞물려 돌아가면서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이들의 ‘거짓말’은 실제로 거짓이 아닌 경우도 자주 있었다.
호스피스에서 만난 14명의 가족관계를 살펴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가족관계에 대해 입을 다문 한순택씨는 대상에서 일단 제외했다. 구술을 근거로, 14명의 가족관계를 살펴봤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이승호·장인철씨를 제외한 12명 가운데 이혼을 경험한 이가 5명이었다. 서창호씨도 이혼 절차를 밟진 않았지만 부인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절반이 배우자와 결별했다.
자녀와 연이 끊긴 경우도 많았다. 자녀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 환자 10명 가운데 자녀 1명 이상과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경우가 5명이었다. 또 질병 등 위기 상황을 가족과 연이 끊긴 채 완전히 홀로 겪어본 경험이 있는 이가 14명 가운데 6명이었다. 부분적인 가정 해체를 경험한 환자는 3명(이종길·김성구·조미희씨)이었다.
‘가족 해체’를 경험하지 않은 환자는 이승호·김성범·이순임·장은숙·정영희씨 등 5명이었다. 이 가운데 이승호씨는 독신으로 살아온 경우였다. 배우자가 살아 있어도, 11월4일 사망한 이순임씨처럼 어려울 때 그다지 지지가 되지 않거나, 정영희씨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사례도 있었다. 결국 가정이 만들어지고 나서 파괴되지 않고 유지된 환자는 김성범·장은숙씨뿐이었다. 빈곤과 질병 속에서 가족이 복지의 첫 번째 안전판 구실을 못하면서 나머지 환자들의 고통은 더욱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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