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표적 한국학자인 제임스 팔래 교수… ‘서구화의 길’은 유일한 대안 될 수 없어
제임스 팔래(67)는 미국에서 한국학이 뿌리내리는 데 기여한 대표적 한국학자다. 1960년부터 한국학 연구에 몰두해온 그는 하버드대의 카터 에커르트, UCLA의 존 던컨 교수 등 미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한국학자들을 길러냈다. 대원군시대의 정책과 제도연구로 1967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팔래 교수는 <전통한국의 정치와 정책>(1975), <유교적 경세학과 한국의 제도: 유형원과 조선후기>(1996) 등 연구서들을 냈다. 그는 현대 한국사회에 대한 관심도 높아 1985년 구로지역의 노동자들과 농민, 재야인사들을 직접 인터뷰한 뒤 이듬해 <한국의 인권>이라는 300쪽이 넘는 방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30년 넘게 재직해온 워싱턴대학교를 정년퇴임하고 최근 한국을 찾은 팔래 교수를 만나 한국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견해를 들었다.
- 대원군의 정치와 정책연구에서 무엇을 발견하였으며 선생님의 이론은 무엇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 대원군의 개혁정책에 대한 연구는 1864년부터 76년까지 세제개혁 등의 국내정책과 쇄국정책으로 요약될 수 있는 대외정책에 관한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핵심적 개혁과제는 삼정문란이었는데 이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군정이었습니다. 대원군은 국가의 세금기반을 확대하고 병역의무를 지는 장정의 수를 늘리기 위해 신분에 상관없이 군포를 부과하려 했습니다. 양반들의 극심한 반발을 샀지만 쇄국정책으로 보수양반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지요.
- 대원군의 개혁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추진되었다고 보십니까. = 국내개혁은 전통적인 조선사회의 맥락에서 볼 때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와 세계사적 맥락에서 한국이 받았던 주된 도전, 즉 근대화라는 과제를 자각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산업화 및 근대화의 문제를 자각하고 있었기에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한 조약들을 없애고 선진적인 기술을 도입하는 데 적극적이었지만 대원군의 대외정책은 이와 반대였고 이점은 대원군의 실수였습니다. 대원군과 지배계층의 근본적 관심은 유교에 기반을 둔 전통사회의 복원으로, 높은 도덕적 기준의 보전이 중요했을 뿐 기술발전 등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 당시의 양반계급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 조선시대 양반들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사회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500년 이상 유지시켜온 장본인이었습니다. 물론 당쟁이나 사화 등 정치적으로 추한 모습도 보여줬지만 조선의 사회제도를 유지하는 데 큰 기여를 했지요.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세계시민적 태도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계수록>을 쓰고 조선 후기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 유형원은 세습적 특권이 확대되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세습은 부모의 신분이 아니라 개인의 윤리적 소양과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유교의 근본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죠. - 조선시대 양반계층에도 높은 신분에는 그에 상응한 의무가 따른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있었다는 뜻입니까. = 그런 점은 성리학적 윤리에 내재돼 있었습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돌보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자선을 베풀도록 되어 있었죠. 뿐만 아니라 이는 일방적인 게 아니라 쌍방향의 것이어서 아랫사람이나 약자가 윗사람에게 지켜야 하는 의무도 포함된 것이죠. 사대와 조공관계도 그런 맥락에서 서로간의 의무를 규정한 것입니다.
- 조선 후기의 개혁이 전통적 가치에 기반을 두었다고 설명했는데, 근대화와 전통적 가치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 실질적인 한국의 근대화는 20세기에 들어서 이뤄졌습니다. 전통적인 가치는 오랫동안 산업화와 근대화를 막고 있었지요. 자본주의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덕의 위기라는 지적을 하지만 자본주의는 속성상 윤리적 가치와 상관없이 이익과 부를 늘리고 기술을 개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집니다. 18, 19세기에 한국사회는 많은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지만 옛 가치, 특히 윤리적 가치를 보존하려고만 했지요.
-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보편적인, 또는 바람직한 근대성은 무엇입니까. 서구화의 길밖에 없을까요.
= 19세기나 20세기 초까지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서구적인 발전의 길이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제 이런 주장은 서구 안에서도 통하지 않아요. 서구에서는 근대화가 산업적, 기술적 발전만을 강조한 나머지 도덕적 가치를 도외시하는 데 대한 비판이 있지요. 그러나 사회가 변화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가 필수적이라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면 할수록 모든 기존의 기술은 낡은 것이 되고 낡은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지요. 자본주의사회에서 이와 같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면 다른 무엇은 파괴됩니다. 한국은 지금 이와 같은 변화들을 매우 혼재된 양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부가 증가하고 많은 것이 파괴됐지만 낡은 사회의 잔재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도 많이 있지요. 대표적인 예가 부패문제인데 일반인들이 윤리적인 데 비해 여전히 정치, 경제적 윤리는 매우 낮고 부패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부패는 널리 퍼져 있었지요. 지방의 향리나 아전들은 녹봉이 없었지 않습니까. 부패는 체질화된 문화인가요.
=팔래: 한국이나 중국에서 중앙정부가 아전이나 향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지 않은 이유는 녹봉을 지급할 경우 예산이 팽창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신 수수료를 받을 수 있게 했는데, 이는 부패를 조장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판했습니다. 부패문제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에서도 예외가 아니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유교적인 신분계급제도상의 윤리적 상호의무로 인해 높은 지위 사람들으로부터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낮은 지위 사람들은 선물 등으로 충성심을 표시해야 했고 이런 관습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구에서는 이런 것이 뇌물이 되지만 한국에서는 일종의 호혜로 연결됩니다. 박정희시대에 형성된 권력과 재벌과의 유착도 이런 호혜관계의 한 사례지요. 기업들이 정치자금을 바치면 세금포탈이나 비리 등을 눈감아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한겨레> 같은 신문들이 부패를 감시하고 폭로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모든 것을 파헤치는 것은 투명화로 가는 과정이고 진보로 향한 중요한 발걸음입니다.
- 한국사회는 가치체계에 있어서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상호의무의 전통이 강하지만 젊은 세대는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등 일상에서 전통과 현대, 유교와 서구적 가치가 대립하고 있는데요.
= 한국은 가치의 충돌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가치기준은 흔들리고, 많은 가치기준들이 공존하면서 부딪치고 있습니다. 갈등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사회는 갈등으로 가득 차 있지요. 문제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갈등을 공개하고 열린 장에서 논쟁과 토론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갈등에 놓여 있는 가치기준들이 열린 논쟁을 통해서 서로 경쟁하면 시간이 갈수록 사회구성원들은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선거 같은 장치들은 이런 경쟁을 보장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표현이나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전통사회에서는 갈등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조선시대에 없던 언론과 NGO 같은 시민단체들이 있어 개방적인 토론이 가능합니다. 그런 면에서 공개적인 논쟁을 통해 정권을 바꾼 경험이 있는 한국은 단 한번도 그런 경험이 없는 일본보다 긍정적인 점이 많은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 중학교 3학년 아들이 재미있는 일, 할 일도 많은데 왜 지나간 옛날 이야기를 공부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디지털시대에 역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 나도 아들 딸 하나씩 있지만 둘 다 역사공부를 하지 않았어요. 자식들에게 내 견해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법학을 전공하고 사업을 하셨는데, 내가 아버지의 사업에 관련된 분야를 공부하기 원하셨지요. 그래서 불문학에 흥미가 있었지만 기계공학을 공부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엔지니어 적성 테스트에서 100점 만점에 8점을 받아서 포기하고 학부 때 화학을 공부했지만 완전히 실패했죠. 결국 미국사로 학사학위를 땄습니다. 대학졸업 뒤 군대에서 우연히 한국어공부를 하다가 한국역사에 완전히 빠져들어 결국 한국을 공부하게 된 것이죠. 자식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야 합니다. 역사는 가끔 삶에 도움된다는 것을 느끼는 것으로 족합니다.
인터뷰/ 정영무 편집장 young@hani.co.kr
정리/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 대원군의 개혁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추진되었다고 보십니까. = 국내개혁은 전통적인 조선사회의 맥락에서 볼 때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와 세계사적 맥락에서 한국이 받았던 주된 도전, 즉 근대화라는 과제를 자각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산업화 및 근대화의 문제를 자각하고 있었기에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한 조약들을 없애고 선진적인 기술을 도입하는 데 적극적이었지만 대원군의 대외정책은 이와 반대였고 이점은 대원군의 실수였습니다. 대원군과 지배계층의 근본적 관심은 유교에 기반을 둔 전통사회의 복원으로, 높은 도덕적 기준의 보전이 중요했을 뿐 기술발전 등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 당시의 양반계급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 조선시대 양반들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사회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500년 이상 유지시켜온 장본인이었습니다. 물론 당쟁이나 사화 등 정치적으로 추한 모습도 보여줬지만 조선의 사회제도를 유지하는 데 큰 기여를 했지요.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세계시민적 태도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계수록>을 쓰고 조선 후기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 유형원은 세습적 특권이 확대되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세습은 부모의 신분이 아니라 개인의 윤리적 소양과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유교의 근본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죠. - 조선시대 양반계층에도 높은 신분에는 그에 상응한 의무가 따른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있었다는 뜻입니까. = 그런 점은 성리학적 윤리에 내재돼 있었습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돌보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자선을 베풀도록 되어 있었죠. 뿐만 아니라 이는 일방적인 게 아니라 쌍방향의 것이어서 아랫사람이나 약자가 윗사람에게 지켜야 하는 의무도 포함된 것이죠. 사대와 조공관계도 그런 맥락에서 서로간의 의무를 규정한 것입니다.

사진/ 한국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팔래(오른쪽) 교수. 그는 미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한국학자들을 길러냈다.
정리/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