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통을 같이 들고 중국군을 향해 돌격했다는 ‘육탄 3용사’의 이야기는 군국 일본의 주류에 의해 ‘미담’으로 포장됐다.http://forum.axishistory.com
남한뿐만인가? ‘육탄용사’들이 자폭하면서까지 모조리 죽여야 할 ‘적군’은 북한군이었는데, 역설적으로 북한이야말로 일찌감치 육탄용사 숭배를 크게 발전시킨 또 하나의 사회였다. 이미 6·25 전쟁 당시에 북한의 전장문학은 ‘살신을 통한 승리 성취’를 적극 찬양했다. 대표적으로 1951년 발표된 월북작가 김만선(1915~?)의 <당증>(원래 제목은 <지뢰>) 같은 소설을 들 수 있다. 북한군의 탱크가 안전하게 진격할 수 있게끔 지뢰를 제거해야 하는 공병대 분대장은, 지뢰가 다 제거되지 않은 채 탱크가 이미 진격을 시작한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행동하는가? 당연하게도(?) 남은 지뢰를 수류탄으로 터뜨려 그 위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전쟁미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북한판 ‘육탄용사’의 찢긴 시신 조각들이 나중에 수습됐을 때 그 팔은 계속 주머니를 움켜쥐고 있었다. 주머니에 신줏단지 이상으로 중요한 노동당 당증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산산조각으로 찢겨도 일편단심이 늘 조국·당·수령, 즉 ‘전체’를 향해야 한다는 것은 북한의 공식 이념이다. 다발총을 몸으로 막았다는데… 이 이념을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교과서적 ‘자폭영웅’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바로 ‘리수복 영웅’이다. 북한 쪽의 공식적 설명에 따르면, 리수복 영웅은 6·25 때 18살의 나이로 38선 근방의 351고지 쟁탈전에서 남한군의 화구를 온몸으로 막아 전사함으로써 부대 돌격의 길을 열었다. ‘위대한 자폭’과 함께 ‘리수복 영웅’을 선전상 이용하기 편한 소재로 만든 것은 그가 죽기 전에 썼다는 시다. “둘도 없는 목숨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하여 바치는 것처럼 아름다운 희망, 빛나는 청춘, 위대한 삶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문제는 개체가 전체(‘조국’)의 훌륭한 부속품이 되는 일 외에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는 지극히 국가주의적 내용의 이 시를, 사실상 조선작가동맹 소속의 문인들이 각색해서 발표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남이든 북이든 ‘육탄미담’들은 늘 그 사실적 내용에서는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불구대천의 적인 김일성주의의 북한과 박정희주의의 남한이 ‘육탄 찬미’만큼은 거의 비슷한 어조로, 같은 용어를 써가면서 했던 셈이다. 과연 양쪽의 ‘육탄문화’가 공통의 뿌리를 가졌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현대 한반도의 ‘육탄’ 찬탄의 뿌리가 완전히 단일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예컨대 적의 화구를 몸으로 막았다는 리수복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2차 세계대전 시절의 소련 군인 알렉산더르 마트로소프(1924~43)의 ‘살신미담’을 원형으로 한다. “부대 돌격의 길을 열기 위해 파시스트 독일군 다발총의 화구를 몸으로 막은 마트로소프 영웅”을, 옛 소련 출신이라면 모를 수 없다. 초등학교 1학년, 아니 유치원 시절부터 마트로소프의 ‘의거’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적 지표라는 것을 한 명도 빠짐없이 배웠기 때문이다. 옛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야 육신을 쉽게 뚫어버리는 다발총의 총탄들을 몸으로 막는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하다는 전문가들의 진단과, 돌격하겠다고 일어서서 적군의 진지에 가까이 다가선 마트로소프가 사실상 적군 다발총의 총탄에 맞아 그저 그 화구 옆에 쓰러졌을 뿐이라는 증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전례를 염두에 두면, ‘리수복 영웅’의 진실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기만 한다. 마트로소프의 ‘의거’를 찬미한 소련 프로파간다가 기반으로 한 이념은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혁명 열사의 정신’이었는데, 그 문화적 뿌리를 따져보면 자신을 희생시킨 예수를 본받아 신우(信友)와 신앙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던져야 한다는 정교회의 전통적 윤리관에 있을 것이다. ‘리수복 영웅’ 찬미 캠페인을 벌인 북한 지식권력자들은, 아마도 기본적으로 유교적 ‘살신성인’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의식적으로 ‘봉건적 유교’를 배격해도, ‘문화적 무의식’ 차원에서는 어디까지나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었을 것이다. 군국주의 세력이 조작한 ‘3용사’ 미담 그런데 여기에서 눈여겨볼 중요한 대목이 있다. 1950년대 북한 인텔리들의 상당수는 태평양전쟁 시기를 국내에서 보내면서 일제의 전쟁 선전에 노출됐거나 적어도 일제하에서 학교교육을 받은 이북 지역 출신 내지 월북자였으며, 남한의 ‘육탄 10용사’ 숭배를 선도한 1사단 사단장 김석원(1893~1978) 장군도- 당시 남한군 고위 장교들의 다수처럼- 일본군 출신이었다. 일제 패망 직전 대좌(대령)로 승진한 그가 ‘육탄 10용사’라는 용어를 만들었을 때 의식적으로 일제가 흔히 사용한 ‘육탄 3용사’라는 말을 참조했다는 증언이 있다. ‘육탄 3용사’는 과연 누구인가? 1932년 2월22일, 중국 상하이를 공격하는 일본 육군의 공병상등병 에시타 다케지(江下武二), 사쿠에 이노스케(作江伊之助), 기타가와 유주루 (北川丞) 등이 중국군 성책 공격이 계속 여의치 않자 긴 폭탄통을 같이 들고 육탄돌격을 함으로써 중국군 수십 명을 몰살시키고 성책을 함락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게 당시 신문들을 통해 알려진 공식적 스토리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다른 ‘자폭 미담’과 마찬가지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도 사실과는 그다지 가까운 관계에 있지 않았다. 전후 학자들이 밝혀주었듯이, ‘3용사 미담’은 사실 육군 첩보부 쪽에서 실제로 중국군에게 사살된 몇 명의- 서로 연관이 없는- 전몰 공병들의 실명을 이용해 조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영웅’에 배고팠던 군국 일본의 ‘주류’에 이 조작된 이야기는 하늘의 선물과 같았다. 당장에 ‘3용사’를 주제로 연극을 급조해 무대에 올려버린 일본 전통극 가부키(歌舞技) 극장이나, 한 달 내로 관련 영화 6편(!)을 쏟아낸 영화 제작사, ‘3용사’를 주제로 창가를 공모해 우승작을 대서특필한 <아사히> 등 주요 신문과 그 창가를 녹음해 레코드를 쏟아낸 주요 레코드 제작업체, 심지어 ‘3용사’ 테마를 맥주 광고(!)에 이용한 기린비루 등 맥주 생산업체나 ‘3용사’ 장난감을 만든 완구업체까지 일본 사회 주류는 일제히 ‘3용사 붐’에 열렬히 동조했다. ‘3용사’ 추모 창가는 국어 교과서에 실리고, ‘3용사’ 미담은 국민윤리(‘수신’) 교과서에 실리고, 한때 온 나라가 하나의 커다란 ‘3용사 기념관’으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이 열광 속에서 대륙 침략전쟁은 당연하다 싶은 일로 ‘절로’ 정당화됐다. ‘3용사’를 생각하면서 ‘육탄 ○용사’라는 명칭을 제안한 김석원은, 1949년의 남한에서도 이같은 효과를 도모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동족상잔이 언젠가 꼭 벌어질 듯한 상황에서 대북 적대심과 함께 외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던 신생 남한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해야 했는데, 이같은 ‘이념공작’에 일제가 남긴 ‘육탄용사’와 같은 사상적 유산은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북한의 지도층도 비슷한 과제를 안고 있었으며, ‘육탄 이데올로기’를 비슷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했다. 당시 남북한은 많은 면에서 일란성 쌍둥이와 같았다.
한국 ‘육탄 10용사’의 61기 추도식이 지난 5월4일 경기 파주 통일공원 내 육탄 10용사 충용탑 앞에서 열렸다. 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