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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부자가 일구는 ‘시인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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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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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곽재구는 어디선가 이렇게 털어놓았다. 문학청년이던 대학시절 새벽에 자취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갑자기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펜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고 대신 연필 칼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연필 칼로 손가락에 작은 금을 내 그 구절을 노트에 붉게 적었다고.

무릇 좋은 시란 스치듯 떠오른 시상을 놓치지 않아야 가능한 것일까. 요즘에서야 이름 석자를 문단에 올린 시인 김병윤(57·도로교통안전공단 전남지부 근무·사진 왼쪽)씨도 불현듯 시상이 떠오르면 곧바로 글로 옮기기 위해 늘 펜과 노트를 들고 다닌다. 아버지와 나란히 시인으로 등단한 김씨의 아들 김동영(18·광주제일고 3년·사진 맨 오른쪽)군도 마찬가지다. 김씨는 “내가 아들에게 가르친 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싯감이니 자세히 속을 들여다보고 그때 그때 생각난 시상을 미친 듯이 메모하라는 것뿐”이라며 “아들도 타고난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고 웃어보였다. 김씨는 <문학세계>(2001년 7월호)에 ‘저문강에 새벽이 온다’ 등 시 5편을 출품해 등단했고, 김군은 문예월간지 <문학21>(6월호) 시부문에 ‘웃음’ 등 5편의 작품을 보내 신인상에 당선됐다.

‘저문 강가로/ 새벽이 허리 굽힌 채 걸어온다/ 강변에 혼자 찾아온 새벽,/ 쿠렁쿠렁 흐르는 강물에 얼굴 씻는다’로 시작되는 ‘저문강에 새벽이 온다’는 이데올로기를 넘어 통일을 지향하는 시라는 게 김씨의 자작시 평가다.

학창시절부터 시인을 꿈꾸던 김씨는 30여년을 경찰에 몸담으면서 틈틈이 시를 써오다 늦깎이 문학도가 됐다. 지난 97년 50대의 나이로 광주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환갑이 다 된 나이에 대학생이 된 것도 그렇지만, “시가 서툴렀지만 꿈을 접지 않았다”고 말하는 김씨에게서는 ‘못다 이룬 꿈’이 될 뻔한 일을 결국 일궈낸 ‘영원한 청년’의 모습마저 느껴진다. 그동안 김씨가 쓴 시는 320여편으로,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리얼리즘에 서정적인 면을 가미한 시”라고 설명했다.

아들 김군은 아버지의 시를 대신 컴퓨터에 입력하면서 ‘시’에 눈뜨게 됐다고 한다. 김군은 등단 심사에서 감수성뿐만 아니라 사물에 대한 참신한 이해와 깊은 성찰에서 비롯되는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각종 교내외 백일장을 휩쓸곤 했던 김군은 대학도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할 예정이다.


김씨는 “‘귀천’과 ‘저승에도 여비가 있어야 가나’ 등을 쓴 고 천상병 시인과 광주대 문창과 지도교수인 이은봉 시인, 그리고 가난과 병마에 허덕이면서도 좋은 시를 쓰는 고재종 시인 등이 나를 가르친 스승들”이라고 등단 소감을 밝혔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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