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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상업고 졸업장이 찢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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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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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명성 뒤로하고 간판 바꾸기 나서… 낡은 교육시스템이 바늘구멍 취업마저 가로막아

사진/ 컴퓨터 교육도 상고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상고의 커리큘럼과 기자재를 혁신적으로 바꾸는 게 필요하다.
지난 1999년 ‘상고 전성시대’라는 말이 다시금 뭇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김대중 대통령(목포상고)은 물론, 당시 최종영 대법원장(강릉상고)과 이종남 감사원장(덕수상고)이 모두 상고 출신으로 핵심 요직에 임명되면서였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남궁석 정통부 장관(선린상고)과 이무영 경찰청장(전주상고), 서형래 청와대 정무1비서관(강경상고) 등도 모두 상고 출신으로 고위직에 올라 있었다. 이 일은 김대중 대통령 특유의 학맥파괴 인사스타일을 부각시켰던 동시에, 과거 상고 출신들의 만만치 않은 학업능력을 새삼 확인시켜준 계기이기도 했다.

실제 50∼70년대 전국 각지의 ‘명문’ 상고 출신들은 경기고나 경북고, 부산고, 전주고 등 ‘일류’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에 버금가는 것으로 인정받았다. “가난하고 똑똑한 학생들이 가는 곳”이란 게 당시 상고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상고의 현실


사진/ 상고는 실업계 교육의 쇠락을 여실히 보여준다. 상고에 진학하는 학생 수는 갈수록 줄어만가고 있다.
하지만 2001년의 현실로 눈길을 돌리면, 상고에 대한 이런 ‘빛나는’ 평가는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다. 김대중 대통령의 모교인 목포상고는 올해 전남 제일고로 이름을 바꾸고 인문계로 전환했다. 마산상고, 광주상고, 동대문상고 등도 올 들어 한꺼번에 인문계로 돌아섰다. 대구상고와 부산상고, 경남상고 등도 인문계 전환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른바 ‘명문’ 상업고일수록 저마다 상고 간판을 내리느라 서두는 모습이다.

상고의 쇠락은 교육부 통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99년 251개였던 상고는 1년 만인 지난해 240개로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일반계 고교는 1162개에서 1177개로 오히려 15개가 늘어났다. 상고 등 실업고를 담당하는 교육부 직업교육정책과 관계자는 “아직 통계가 다 안 나왔지만, 올해도 상고 수는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가히 ‘상고의 위기시대’다.

상고의 위기는 물론, 공고와 농고 등 실업계 고교 전체의 위기와 한데 묶인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자격증보다 학벌, 학력이 더 큰소리치는 일그러진 현실이다. 대학이 지상목표가 된 교육 현실에서 취업을 중심에 놓는 실업계 교육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실업계 진학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깊어만 가고, 그 여파로 실업계 진학자의 학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인천 선화여상 하인호 교사(전교조 실업특별위원회 위원장)는 “무조건 대학을 나와야 사람대접받는 현실과 사회적 편견이 실업교육을 망친 주범”이라고 성토했다. “학부모들부터 실업계 가면 대학 못 가고, 그러면 인생을 망친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명문 상고를 나와 성공한 선배들도 후배들이 공장이나 다니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며 인문계 전환을 부추기는 실정이다.”

최근엔 실업계 지원율 자체도 절대적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실업계 입시경쟁률은 불과 0.87 대 1. 거의 모든 학교가 대규모 미달사태를 겪어야 했다. 좀 나아졌다지만 올해 경쟁률도 1.03 대 1에 그쳤다. 충북, 전북, 경남은 지난해에 이어 정원미달이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실업계 전반이 극심한 몸살을 앓는 가운데서도 특히 폐교나 인문계 전환의 소용돌이에 가장 거세게 휩쓸린 곳이 하필 다름아닌 상고라는 것이다. 같은 실업계지만 공고는 99년 202개에서 2000년 204개로 학교 수가 오히려 늘었다. 농고는 25개에서 24개로 1곳만 줄었다. 학생 수의 감소폭도 상고가 훨씬 크다. 공고는 97년 36만명에서 2000년 30만명으로 6만명이 줄었지만, 상고는 46만명에서 34만명으로 무려 12만명이 감소했다.

상고가 이처럼 한층 더 깊고 거센 위기에 빠져든 것은 어째서일까? 무엇보다 상고의 사회적 기능과 효용 자체가 다른 실업계열에 비해 더 크게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공고 강연흥 교사(40·전교조 서울지부 실업특별위원회 위원장)는 “공고는 산업현장과의 지속적 연계를 통해 기술변화에 적응해온 반면, 상고는 과거 상고 출신들에게 주어졌던 전문사무능력의 사회적 효용성이 사라지면서 실업계 고교의 정체성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보화와 사무자동화 등의 영향으로 이전에 상고 출신들이 주로 맡았던 단순사무직이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옛 선린상고가 이름을 바꾼 선린인터넷고 천광호 교장은 “옛날에는 상고 나오면 은행에 취직했지만, 요즘 대다수 상고 출신들은 꿈도 못 꿀 일”이라며 “상고 나와봐야 제대로 취직도 못하는데 누가 상고를 찾겠느냐”고 말했다. “정보화시대가 되면서, 상고에서 가르치던 주산이니 부기 등 단순사무기능은 불필요해졌다. 상고가 이름을 정보산업고로 바꾸면서 컴퓨터 관련 교육을 강조했지만 이조차도 단순한 워드작업 등의 기능은 큰 의미가 없다. 사무실에서 심부름하는 정도의 단순작업 아니면 아예 높은 전문지식을 요구하다보니 어중간한 상고 출신이 설 곳이 사라진 것이다.”

고학력자들이 사무직 자리로 하향 취업

사진/ 상고 학생들은 졸업장을 내밀 기회를 아예 봉쇄당하기도 한다. 상고 학생들이 학교 취업 게시판을 바라보고 있다.
사회 전반적인 학력인플레도 상고생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남아 있는 사무직 자리조차 전문대나 대학 졸업자들이 하향지원해 차지하게 되다보니 상고 출신들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처지다. 공립이 많은 공고나 농고 등과 달리 사립이 대다수인 상고의 특성도 상고 위기에 한 요인이 되고 있다. 강연흥 교사는 “공고가 엄청난 설비투자 때문에 공립이 많은 반면, 상고는 대부분 사립”이라며 “사립 재단들이 정원미달에 따른 경영난에 시달리느니 인문계로 전환하는 것이 낫겠다고 쉽게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고 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학생들일 수밖에 없다. 상고에 쏟아지는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자칫하면 다니던 학교 자체가 사라지는 당혹스러움까지 경험하게 된다. 최근 영락교회와 서울시교육청 등의 인터넷 게시판엔 폐교결정 철회를 요구하는 서울 관악구 영락여상 학생들의 사연이 넘쳐나고 있다. 영락교회 계열의 영락여상 재단이사회가 지난 4월 상고 폐지와 인문계 전환을 결정한 뒤 벌어지는 일들이다. 2002년부터 상고의 신입생 모집을 중지하고, 같은 재단의 인문계 고교인 영락고의 학급 수를 확대하기로 한 이사회 결정은 지금 교회 당회의 최종 재가만 남겨두고 있다. 윤아무개(18)양은 “늘 인문계 학생들의 눈치를 보며 무시를 당한 것도 억울한데, 학교까지 없어지면 우리 영락여상 학생들의 맘에는 언제까지나 치욕으로 남을 것”이라며 “제발 학교를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고아무개(18)양은 “인문계보다 공부를 못하긴 하지만, 창의력과 인성에선 결코 못할 바 없다고 본다”며 “왜 이사회는 상고라고 무시만 하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김형윤 교장은 “국가의 실업교육에 대한 대책이 시원치 않다보니 학교운영이 어려워져 이사회에서 불가피하게 내린 결정이지만, 49년 역사를 마감한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남아 있는 상고 학생들도 미래에 대한 불안과 주변의 삐딱한 시선에 부담스럽긴 매한가지다. 신정여상 3학년 최샛별(18)양은 “어려운 형편 때문에 상고를 왔지만, 열심히 공부해 취업한 뒤엔 야간대학도 다닐 계획”이라며 “하지만 상고 가면 놀고 대학도 못 간다는 인식에 힘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한번은 남자친구 어머니께서 왜 하필 상고 애와 사귀냐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어요. 당당히 제 포부를 말씀드려 인정받았지만, 주위엔 그런 인식에 굴복하는 아이들도 많아요.”

김진경(18)양은 “인문계 가면 바닥이지만, 상고 가면 상위권에 들 수 있다고 해서 상고를 선택했다”며 “상고에선 인문계보다 자유롭게 자기 꿈을 펼칠 기회도 많아 좋긴 한데, 최근 들어선 점점 취업의뢰가 줄어들고 계약직 등 조건도 나빠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졸업과 함께 당당한 사회인으로 설 수 있는 제대로 된 상고교육의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아무개(18)양은 “취업해도 전망이 밝지 않다보니, 친구들도 모두 어떻게든 대학을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신정여상 성원식(45) 교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취업할 수 있는 인재로 교육할 여건이 안 된다는 게 무엇보다 큰 문제”라며 “컴퓨터 실습실도 부족하고 인터넷 연결도 일부만 돼 있어, 아이들이 방과후 별도로 컴퓨터학원을 다녀야 하는 실정부터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교육 내실화로 살아남기 모색해야

천광호 교장은 “교육부나 상고 관계자나 모두 기존의 낡은 상업교육 틀을 벗고 시대 조류에 맞는 특성화 교과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실천과 지원이 따르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정보화와 특성화를 이야기하지만 대다수 상고들은 이름만 정보산업고다, 사이버학과다 하고 바꿨을 뿐, 제대로 된 커리큘럼이나 기자재를 제공해 내실있는 교육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부터 바꿔 아이들에게 전문인으로 클 수 있는 기회와 희망을 심어줘야 낮아질 대로 낮아진 사회적 인식도 달라질 것입니다.” 실제 선린상고는 선린정보산업고로 이름을 바꾸고도 계속 지원율과 학력 저하에 시달렸지만, 인터넷고로 이름과 교과과정을 확 바꾼 뒤론 수많은 우수 학생들이 몰려드는 신흥 실업 명문고로 떠오르고 있다. 천 교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이름에 걸맞게 내실화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사진=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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