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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트루먼에게 유죄를 선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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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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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을 법의 이름으로 단죄한 ‘코리아 전범재판’

사진/ 24일 새벽(한국시각) 뉴욕 인터처치센터에서 열린 코리아 전범재판에서 검사의 기소와 피해자의 증언이 끝난 뒤 한국전쟁 참전국을 비롯한 8개국 배심원들이 트루먼 등 당시 미국 정부 대표의 유죄를 평결하고 있다.
“1945년 해리 트루먼 이후 조지 부시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모든 대통령과 국무·국방장관, 각급 정보기관의 책임자 및 주한미군 사령관들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12시간에 걸친 긴 재판 끝에 배심원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최강대국 미국 정부를 이끌어온 책임자들을 단죄했다. 피고들의 죄명은 ‘민간인학살’을 비롯한 반인류적 전쟁범죄행위.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곳은 한반도였다.

한국전쟁은 미국의 인종말살전쟁


‘미군 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는 6월24일 새벽(한국 시각) 미국 뉴욕인터처치센터에서 역사적인 ‘코리아 전범재판’을 열고, 6·25 한국전쟁 당시 각종 전쟁범죄의 주범으로 지목된 미국 정부를 전쟁 발발 51년 만에 단죄했다.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유족 등 남쪽 참석자 60여명을 비롯해 미국, 일본, 캐나다의 해외동포들과 세계 각국 민간단체 활동가 등 700여명이 미국 정부가 징죄당하는 역사적인 현장을 감격 속에 지켜보았다.

전 미국 법무장관이자 세계적인 반전평화운동가인 램지 클라크는 이날 공동검사단의 수석검사 자격으로 기소문을 발표하고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300만명이 넘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45년 해방 직후 지금까지 세계인권헌장과 조약, 각종 국제규약 및 협정, 미국과 한국, 북한의 법 등을 모두 위반하며 각종 범죄를 한반도에서 저질렀다”며 “평화와 인권과 민족의 자존을 존중하는 국제규약의 이름으로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한국전에 참가한 13개국을 비롯해 전세계 18개국 출신 26명의 민간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평결문에서 “각종 국제규약을 준거로 하고 각종 증언과 서류증거 및 전문가들의 보고서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한국전쟁 당시와 이를 전후한 민간인학살 등 피고인들의 유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을 법의 이름으로 심판한 이번 재판은 램지 클라크 전 미국 법무장관,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 등 6명의 공동검사단과 배심원들이 각각 기소와 평결을 맡았으며, 지텐드라 샤르마 전 인도 대법원장 등 2명이 재판관으로 참가했다.

비록 법적 구속력이 없는 민간법정인데다 피고로 지목된 대부분의 미국 정부 요인들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지만, 미국이 한국전쟁 때 저지른 범죄들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공개됐다는 점에서 이날의 법정은 법전 너머의 가치를 갖고 있다. 이번 행사를 공동주관한 국제행동센터(IAC) 브라이언 베커 의장은 “우리가 하는 일은 ‘사실’을 알리는 일”이라며 “‘한민족에게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도록 하라’(Let the Korea Be the Korea)는 것이 이번 재판의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날 법정에서는 ‘민족자결권’이라는 오랜 원칙을 새삼 강조하는 것을 뛰어넘어 한국전쟁에 대한 급진적인 해석과 함께 미국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책임추궁이 잇따랐다. 베커 의장은 폐막사를 통해 “한국전쟁은 동족간의 전쟁이 아니라, 동족간의 싸움과 분열을 부추긴 미국이 다른 나라들까지 끌어들여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자행한 인종말살전쟁”이라며 “미국 정부는 한민족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미국민의 이해조차 따르지 않으며, 오로지 부를 차지한 일부 백인계층의 정치·경제적 이해만을 추구한다”고 잘라 말했다.

북쪽이 제안한 전민특위의 성과

이들의 주장이 ‘급진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미국인은 물론 한국인들조차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많은 장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법정의 진행을 맡은 미국 반전활동가 새라 플라운더스는 “한국전쟁으로 이익을 얻은 사람들에 의해 역사가 서술됐으므로, 지금까지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라며 “전쟁을 수행한 미국 정부는 교육·미디어 등을 통해 자국민은 물론 한국인들까지도 전쟁의 원인과 실상을 단순화시켜 인식하게 하거나 아예 무관심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런 점에서 이날 법정의 가치는 ‘사실 발굴’보다 ‘사실 공유’에 있었다는 평가다. 세계 각국 70여개 민간단체에서 활동하는 참석자들은 총탄자국까지 보여주며 피맺힌 기억을 더듬는 남쪽 피해자들의 증언과 입국이 불허돼 영상을 통해 법정에 참가한 북쪽 피해자들의 설명 앞에서 충격의 탄성과 비탄의 눈물을 억누르지 못했지만, ‘사료적 가치’로 볼 때 이들의 증언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조차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논의되고 있는 한국전 당시 민간인학살의 진상이 반전평화단체를 비롯한 국제여론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결코 쉽게 볼 일이 아니다. 실제로 이번 재판을 앞두고 〈CNN〉 〈BBC〉 〈AP〉 등 서구 유력언론들이 이 문제를 비중있게 다룬 것은 반세기 전에 일어난 전쟁이 21세기에 와서야 정당한 ‘관심’과 ‘의혹’의 대상이 됐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번 ‘코리아 전범재판’의 직접적인 촉발은 지난 99년 〈AP 통신〉에 의해 보도된 노근리 민간인학살사건이다. 이 보도는 미국 내 양심세력들의 여론을 들끓게 했다. 90년대 들어 <한겨레>, 월간 <말> 등이 이 문제를 여러 차례 다룬 바 있어 국내에서는 비교적 ‘상식’에 속했던 한국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학살문제가 미국 유력 언론사의 보도를 통해 미국인들에게 ‘새롭게’ 부각된 것이다.

노근리 민간인학살 보도 이후 이에 대한 진실규명과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국제여론의 움직임이 본격화했고, 국내에서도 피해자 유족들의 증언이 잇따랐다. 마산, 함안, 의령, 부산 등 전국 곳곳에서 미군이 민간인을 집단학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북한은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피해지역이 100여곳에 이른다고 공식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노근리사건을 극히 ‘예외적이고 우발적’인 것으로 치부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북쪽은 지난해 1월25일 ‘미군 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이하 전민특위) 구성을 남한의 정당, 사회단체와 해외동포들에게 제의했다. 한반도 전역에 걸친 미군의 민간인학살 실태를 남북이 공동으로 조사하자는 취지였다. 4개월 뒤에는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를 대표하는 실무자들이 중국 베이징에서 만나 ‘전민특위’ 구성을 위한 실무접촉을 갖고 공동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자리에선 전민특위의 첫 번째 공동사업으로 ‘국제민간법정’을 개최한다는 결의도 함께 마련됐다.

범국민위와의 관계 설정이 과제

전민특위 등 민간법정을 주관한 각국 단체들이 공동발간한 ‘한국에서의 미군 범죄에 대한 보고서:1945―2001년’이라는 자료집은 한국전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500여쪽에 이르는 이 자료집은 세계 각국 주요 반전평화단체가 남과 북을 오가며 수집한 각종 증언과 증거를 집대성한 것이다. 충실한 자료 분류를 통해 한국전 당시 상황에 대한 일관성 있는 접근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번 재판의 기소와 평결도 모두 이 자료집을 토대로 이뤄졌다. 이번 민간법정이 ‘이벤트’가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만행을 밝혀나가는 기나긴 행군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고지’를 정복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전범재판의 성과를 어떻게 이어갈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북쪽의 제안과 주도 아래 만들어진 ‘전민특위’에 대해 남쪽 당국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당국은 남과 북, 해외본부로 구성된 이 단체가 ‘제2의 범민련’이 아닌지 의혹을 던지고 있다. 이번 재판을 앞두고 전민특위 남쪽본부 실무자들에 대해 출국금지 조처를 내린 당국의 결정은 벌써부터 이들의 활동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한국전 당시 민간인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또다른 축인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범국민위)와의 관계설정도 중요한 과제다. 유족단체와 학계, 법조계,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범국민위는 한국군·경 및 좌·우익단체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학살 전반에 대한 폭넓은 진상규명과 피해자 배상을 목적으로 특별법 제정을 서두르고 있다.

전민특위가 한국전 당시 군사지휘권을 갖고 있었던 미군의 ‘원죄’를 캐묻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것에 비해, 범국민위는 좌·우익을 망라한 민간인학살에 대해 사상 처음으로 정부 차원의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전민특위가 미국에 의한 제3세계 지배전략의 하나로 자행된 민간인학살문제를 풀어간다면, 범국민위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집중하고 있는 셈이다.

전민특위 공동사무국의 한 관계자는 “자칫 같은 문제를 놓고 진보진영이 내분을 겪는 것처럼 비칠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라며 “범국민위쪽과 폭넓은 대화를 통해 공조와 연대가 중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중요한 건 양쪽 사이에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 것과 양쪽이 이런 사실을 깊이 공유해야만 학살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뉴욕=글 안수찬 기자 /한겨레 사회부 ahn@hani.co.kr
사진=이정우 기자/ 한겨레 사진부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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