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 복원의 외길 가는 모사화가 윤문자씨, 그가 겪어온 고난들
모차르트의 명곡을 훌륭하게 연주해내는 이는 예술가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그림을 훌륭하게 그려내는 이는 죽었다 깨어도 그냥 화공일 뿐이다. 왜 명연주자의 연주는 진짜이고 명화가의 모사는 가짜일까? 혹시 이 논리는 고가의 거래상품인 미술품의 화상들이 만들어낸 음모는 아닐까? 정확한 답을 내놓을 수는 없지만 미술이 대중과 멀어지는 데 이런 원본지상주의, 진품신비주의도 한몫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돈벌려는 거냐, 훔치려는 거냐…
모사화가는 프랑스말로 아르티장(artisan: 화공, 직공)이다. 이들은 아르티스트(artiste)가 아니다. 창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재 관리가 철저한 나라에서는 아티스트 이상의 대접을 받기도 한다. 박물관과 미술관마다 공인된 모사화가들을 두어 원작을 복원하거나 보호하고, 심지어 정부지원으로 모사화가 양성소를 운영하기도 한다. 루브르박물관에서 한 방을 차지하고 있는 <모나리자>의 경우 공인된 모사화가 몇점 있다. 이것들은 가짜가 아니라 원본을 도와주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원본 대신 험한 바닷길을 헤치고 가서 낯선 박물관의 분진과 소음을 견디어주기 때문이다.
윤문자(51)씨는 우리 옛 그림을 고스란히 베껴내는 모사화가다. 헌데 20년 넘도록 미친 듯이 베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돈벌려는 거냐, 훔쳐가려는 거냐, 장난치는 거냐…. 원본 보이기를 아까워하던 박물관과 미술관 관계자들이 그에게 씌웠던 혐의들이다. 교수 직함도 없고 이름난 예술가 꼬리표도 없는 그가 원화를 만나기란 임금님 얼굴 보기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게 훔쳐보고 몰래 보아 고스란히 복원해낸 생활화, 장식화, 기록화들은 수십점에 달한다. 그래서 지난 6월5일부터 엿새간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도 열었다.
세상이 그의 작품을 대접해주게 됐지만 그는 여전히 답답하다. “오늘 낮에 고려대박물관에 <동궐도>가 전시돼 있다고 해서 들렀는데, 정말 안타까웠어요. 전시의 자체는 참 훌륭했지만, 작품이 낡아 있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군데군데 귀퉁이가 떨어져나가고. 내 후손들은 나중에 이걸 못 보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요즘엔 박물관에서도 작품 보존을 위해 모사화의 필요성은 느끼지만 돈이 없어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6월14일 오후 인사동의 한 낡은 건물 꼭대기에 있는 작업실 ‘덕산우리그림연구소’에 들렀을 때 대뜸 그가 한 말이다. 작업실은 전시회 때 받은 양란화분 몇개가 눈에 띌 뿐 고즈넉했다. 붓질을 뜯어볼 때 사용하는 돋보기가 작업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원래 목요일이면 그림 배우는 이들이 와서 작업을 하는데 이날은 전시회 뒤끝이라 한주 쉬기로 했단다.
그가 민화와 인연맺은 것은 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림에 관심이 많던 한 평범한 주부의 발길을 잡아챈 것은 인사동의 어느 허름한 가게에 걸려 있던 <호작도>였다. 까치와 마주보고 있던 호랑이의 표정이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해서 한동안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다. 민화가 옛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무작정 따라 그리며 박물관과 미술관을 좇아다니는 험난한 여정에 올랐다. 스케치도 하고 몰래 사진도 찍었다. 처음엔 자신이 하는 일이 뭔지 잘 몰랐다. 그것이 문화재 관리가 철저한 나라에서는 정책적으로 육성하는 일이라는 것을 안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우리나라는 불과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해외전시에 꼬박꼬박 원작을 보냈다. 그랬다가 깨진 도자기며 망가진 그림들이 부지기수다. 국내에서는 더 못 볼 꼴이 많았다. 이름난 미술관에서도 원본이 훼손되거나 손질에 들어갈 때면 작품 대신 작품 사진을 턱 하니 걸어놓았다. 창피한 일이었다. 이런 무식함은 원본지상주의, 진품신비주의와 맞물려 대중을 점점 미술로부터 떼어놓는 데 일조했다는 게 윤씨의 생각이다.
어릴 적 ‘환쟁이’의 기억
다행히 몇년 전 민화열풍이 불면서 창작운동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변형하거나 비슷하게 베껴내는 그림들도 많이 나왔다. 하지만 옛 그림을 복원하고 재현하는 작업에 신명을 바치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이러다보니 서양화풍에 길들인 손길 따라 봉우리도 망가지고 색처리·원경처리도 점점 달라진다. “창작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사라져가는 민화를 복원하고 재현해 살려내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돈도 되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업을 나홀로 해올 수 있었던 밑천은 무엇일까. 그는 어릴 적 장터에서 본 ‘환쟁이’들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진달래꽃 빻고 들풀 찧어 색 만들어 쓰던 그 시절, 조부는 그들의 그림을 하나씩 사와 다락문 앞에 덧붙이곤 했다. 어떤 건 막걸리 한잔 값이고, 어떤 건 보리 서너되 값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락문 앞에서는 두꺼비 위로 목동이 피리불고, 다시 그 위에서 산새들이 지저귀고, 어느 틈엔가 이름모를 풀꽃이나 흐드러진 능소화가 넘실대기도 했다.
그는 그 그림들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병약했던 윤씨는 신식물이 밴 어머니 품을 떠나 청소년기를 충북 진천의 덕산면에서 보냈다. 그의 호 덕산(德山)은 중의적인 셈이다. 들로 산으로 쏘다니는 동안 살이 붙고 뼈가 자랐다. 자연이 결국 그를 살렸다. 뒷산에 하얗게 피던 싸리꽃과 세상을 가르듯 떠오르던 태양이 그의 벗이었다. 이런 원체험들이 우리 민화에 대한 절절하고 외로운 짝사랑을 이어오게 해줬는지 모른다.
“장식성 많은 궁중화도 투박한 민화도 모두 사람 사는 사연을 담고 있죠. 왕족이나 서민이나 자식 많이 낳아 잘되고 복되고 여유로운 삶을 소망하던 것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림 보면 다 나와요. 느껴져요. 자연과 공동체가 두루뭉수리 엮인 채 이어오던 삶의 맨 얼굴 같은 것이.”
옛 화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복원하다보면 그들의 숨결마저 느껴진다. 심지어 실수한 듯한 붓질이 보일 때도 있다. 도화서의 궁중화가들 사이에서도 실력차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왜 이리 못 그렸을까 싶은 순간도 있다. 그럴 때면 윤씨는 망설인다. 바로잡아야 하나, 아니면 그냥 그대로 가야 하나. 갈등 뒤 그는 틀리게 그린 거라도 그대로 옮긴다. 실수와 잘못 역시 그대로 옮겨야 완벽한 재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그도 한때 심각한 기로에 놓인 적이 있었다. “붓이 손에 붙는다 싶을” 때였다. 창작과 모사 사이에서 흔들리던 마음을 잡아준 이는 뿌리찾기 민학운동을 펼치던 조자룡(지난해 75살로 작고)씨였다. 하버드대에서 건축을 전공한 뒤 돈을 많이 벌었던 조자룡씨는 번 돈을 온통 옛 물건 구하고 전통마을 짓고 삼신각 복원하는 데 쓴 사람이다. “조자룡 선생의 말이 위협반, 격려반이었는데 ‘네가 지금 하지 않으면 아무도 안 한다’는 거였어요. 그 뒤로 석채연구나 귀한 자료수집도 많이 도와주셨죠.”
석채는 돌을 갈아 쓴 색이다. 옛 궁중장식화나 기록화는 대부분 석채를 써서 화려하고 깊이가 있다. 천연석채란 땅 속 깊은 곳에서 화학반응을 일으켜 신비한 빛깔을 띤 원석을 갈아 입자 크기별로 나누어 낸 색을 쓰는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석채의 맥이 끊겨 일본에서 구해와야 한다. 금가루 2g이 5만원돈 하는데, 석채 역시 대략 그 정도 가격이다. 윤씨는 일본에서 비싸게 구해오는 것도 억울하지만 우리 땅에서 나는 석채가 사라진 것은 안타깝다 못해 원통하다고 말한다.
과거엔 개념 없고, 지금은 돈이 없고
이번 전시에서 가로 21m가 넘는 두루마리로 펼쳐진 <반차도> 역시 천연석채를 쓴 것이다. 정조의 능행장면을 담은 이 그림은 사람이 몇명 따랐고 말은 몇필 동원됐고 임금은 어떠했는지까지 당시의 의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세세한 기록화다. 윤씨에 앞서 역사학자 한영우 교수가 이를 복원해 서울대 규장각에 걸어놓기도 했다. 이 그림에 대해 윤씨는 기쁨 반, 슬픔 반이다. 역사적 사료로 되살아난 것은 좋지만 미술사적 복원까지 맞물렸다면 더욱 좋았을 것을. 그는 <반차도>를 7년 가까이 걸려 재현해냈다. 함께 걸린 <능행도> 역시 5m 넘는 8폭 병풍으로 여러해가 걸린 방대한 작업이었다. 원본을 마음 편히 볼 수만 있었어도 일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과거에는 개념이 없어 문제였지만 오늘날에는 박물관이나 미술관마다 돈이 없어 문제다. 굳이 외국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이리 고치고 저리 옮기는 비용을 조금만 줄여도 작품모사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게 윤씨의 아쉬움이다. 옛 그림들이 하나둘 소실되고 작풍 역시 실종되는 모습을 두눈 멀쩡히 뜨고 보아야 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윤씨는 삶의 여유와 미학이 밴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사는 게 행복하다고 말한다. 요즘 같은 물량과 속도의 시대에 그는 천상 외로울 것 같다.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이는 아직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 외로운 마이너리티이지만, 어디선가 그런 이가 있기를 손모아 빈다고 한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사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베끼기 인생’을 선택한 윤문자씨. 평범한 주부였던 그는 70년대 인사동에서 민화를 본 뒤 무작정 이 길에 뛰어들었다.(강창광 기자)

사진/ 윤씨에 의해 복원된 <동궐도> 일부.

사진/ 정조의 능행장면을 담은 <반차도>. 천연석채를 재료로 썼다.

사진/ 옛 화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복원하다보면 그들의 숨결마저 느껴진다. 정성스레 복원작업을 하고 있는 윤씨.(강창광 기자)









